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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2020

전능하신 하나님 말씀 낭송 <성품이 변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적이 된다>

 

사람은 수천 년의 패괴를 겪고 나서 모두 무감각하고 우둔해졌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마가 되었다. 그리하여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한 역사(歷史)는 모두 ‘사기(史記)’에 기록되었고, 심지어 사람의 패역한 행위는 사람 스스로도 다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사탄에 의해 너무 심하게 패괴되었고, 이미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갈 곳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다. 사람은 하나님을 보고도 배반하고, 하나님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도 배반하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본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배반한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의 이성이 원래의 기능을 잃었고, 사람의 양심도 원래의 기능을 잃었다고 말한다. 내 눈에 보인 사람은 모두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자 독사다. 사람이 내 앞에서 얼마나 가련한 척을 하든 나는 사람에게 연민의 정을 베풀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흑과 백의 차이를 전혀 모르고, 진리와 비진리의 차이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성이 이렇게 무감각함에도 여전히 복을 받고 싶어 하고, 이렇게 비열한 인성을 가지고도 여전히 왕이 되어 권력을 잡고 싶어 한다. 이런 이성을 가지고 누구에게 왕 노릇을 하겠느냐? 이러한 인성으로 어떻게 보좌에 오를 수 있겠느냐? 정말로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구나! 모두 제 주제도 모르는 소인배로구나! 복을 받고 싶어 하는 너희들에게 권하는데, 우선 거울을 찾아 자신의 추한 몰골을 비춰 보아라. 네가 왕이 될 재목이냐? 너는 복받을 만한 오관을 가졌느냐? 성품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진리를 조금도 실천하지 못하면서 아름다운 앞날을 생각하다니 참으로 망상이 아니고 무엇이냐! 이토록 더러운 땅에서 태어난 사람은 심하게 사회에 물들었고, 봉건 예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고등 학부’의 교육을 받았다. 뒤처진 사상, 부패한 도덕, 저열한 인생관, 비열한 처세 철학, 일말의 가치도 없는 삶, 저속한 풍속과 생활, 이러한 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심하게 침해하고, 사람의 양심을 심하게 파괴하며, 사람의 양심에 타격을 주고 있다. 이로 인해 사람은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고 갈수록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사람의 성품은 나날이 더 악랄해져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거나 하나님께 기꺼이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기꺼이 하나님의 나타남을 찾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반면에 사람은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마음껏 쾌락을 찾아 즐기고, 진흙탕에서 마음껏 자신의 육체를 패괴시키고 있다.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설령 진리를 듣더라도 실천할 마음이 없고, 하나님이 이미 나타난 것을 보아도 찾으려는 마음이 없다. 이렇게 타락한 인류에게 구원의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겠느냐? 이렇게 부패한 인류가 어떻게 빛 속에서 살 수 있겠느냐?

사람의 성품이 변화되려면 사람의 본질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변화되어야 한다. 사람의 사상, 본성, 정신 면모에서부터 변화되어야 하고,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사람의 성품이 진정으로 변화될 수 있다. 사람의 패괴된 성품의 근원은 사람이 이미 사탄에게 해를 입고 사탄에게 짓밟혀 사람의 사상, 도덕, 식견, 이성이 사탄에 의해 심하게 파괴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의 근본적인 것들이 이미 모두 사탄에 의해 패괴되어 하나님이 만든 원래의 모습과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성품이 변화되려면 우선 사람의 사상, 식견, 이성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진리에 대한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 가장 심하게 패괴된 곳에서 태어난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란 무엇인지 더더욱 모른다. 사람은 심하게 패괴될수록 하나님의 존재를 더 알지 못하고, 이성과 식견이 더 부족하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는 근본적 원인은 사람이 사탄에 의해 패괴되었기 때문이다. 사탄에 의해 패괴되어 사람은 양심이 무감각하고 도덕이 부패하고 사상이 진부하고 정신 면모가 뒤처지게 된 것이다. 사람은 사탄에 의해 패괴되기 전에는 본래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바로 순종했으며, 이성과 양심이 건전하고, 인성이 정상적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사탄에 의해 패괴된 이후로 사람에게 원래 있었던 이성과 양심, 인성이 무감각해지고 전부 사탄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리하여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사랑을 모두 잃게 된 것이다. 사람의 이성이 정상에서 벗어나고, 사람의 성품도 짐승처럼 변해 하나님에 대한 패역이 점점 많아지고 심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아직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고 무턱대고 대적하고 거역하기만 한다. 사람이 드러내는 성품은 곧 사람의 이성, 식견, 양심의 발현이다. 사람은 이성과 식견이 건전하지 못하고, 양심이 극도로 무감각해졌기 때문에 사람의 성품 또한 하나님을 거역하는 성품이 된 것이다. 사람의 이성과 식견을 바꾸지 못하면 성품 변화는 물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는 것도 말할 나위가 못 된다. 사람은 이성이 건전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고 하나님께 쓰임 받기에도 적합하지 않다. 정상적인 이성이란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스러우며,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고, 하나님에 대해 절대적이고 양심적이며, 하나님에 대해 일편단심이고, 고의로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는 것이다. 비정상적인 이성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사탄에 의해 패괴된 후 하나님에 대해 관념이 생기고,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이 사라졌으며, 하나님을 사모하지 않게 되었다. 양심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고의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판단할 뿐만 아니라, 뒤에서 하나님을 욕하고, 하나님인 줄 뻔히 알면서도 뒤에서 판단하며, 순종하려는 마음은 조금도 없이 계속 하나님께 달라고 하고 요구하기만 한다. 이처럼 이성이 비정상적인 사람은 자신의 비열한 행위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패역한 행위를 통회하지도 못한다. 자신을 알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래도 이성이 조금은 회복된 사람이다. 하나님을 거역하면서도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이성이 더 건전하지 못하다.

사람의 패괴 성품이 드러나는 근본 원인은 사람의 무감각한 양심, 악독한 본성과 건전하지 못한 이성에 있다. 사람의 양심과 이성이 정상으로 회복된다면 하나님께 쓰임 받기에 적합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사람의 양심이 줄곧 무감각한 상태에 있고, 사람의 이성이 한 번도 건전했던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점점 더 무감각해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심지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말세에 하나님이 입은 육신을 문전 박대 하며, 하나님의 육신을 정죄하고, 또 하나님의 육신이 비천하다고 여긴다. 사람에게 인간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하나님이 입은 육신을 이렇게 잔혹하게 대할 수 없고, 이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하나님이 입은 육신을 이렇게 악독하게 대할 수 없으며, 정말로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성육신 하나님께 이같이 ‘감사’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성육신한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좋은 기회를 준 하나님께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이 온 것을 욕하거나 하나님이 성육신한 사실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어쩌면 부정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귀찮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나님이 온 것을 사람이 어떻게 대하든 하나님은 싫은 기색 없이 계속 자신의 사역을 한다. 사람이 그를 조금도 환영하지 않고, 그에게 계속 뭔가를 요구하더라도 말이다. 사람의 성품은 극도로 악독해졌고, 사람의 이성은 극도로 무감각해졌으며, 사람의 양심은 이미 악한 자에게 짓밟혀 원래 가지고 있던 양심은 진작에 사라져버렸다. 사람은 성육신 하나님이 인류에게 베풀어 준 이처럼 많은 생명과 은혜에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풀어 준 진리로 인해 하나님을 혐오하고, 진리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해 하나님에게조차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 사람은 성육신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서 ‘기름을 짜내고’ 자신이 하나님께 드린 것보다 수십 배나 많은 이자를 달라고 요구한다. 사람은 이런 양심과 이성을 가졌으면서도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며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 것이 너무 많고 반면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푼 것이 너무 적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물 한 그릇을 주고는 우유 두 그릇 값의 금화를 달라고 손을 내밀고, 내가 그의 집에서 하룻밤 묵으면 이보다 몇 배 넘는 숙박비를 요구한다. 너희는 이런 인성과 양심을 갖고도 생명을 얻으려 하느냐? 정말 비열한 소인배들이구나! 사람의 이런 인성과 양심 때문에 성육신 하나님은 기거할 곳 없이 곳곳을 떠돌게 된 것이다. 정말로 양심과 인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성육신 하나님이 이렇게 많은 사역을 했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설사 그가 아무런 사역을 하지 않더라도 마땅히 그를 경배하고 일편단심으로 그를 섬겨야 한다. 이것은 이성이 건전한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사람의 본분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도 조건을 내건다. 그런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인지 사람인지는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조건만을 얘기하거나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고만 한다. 너희는 나에게 밥을 지어 주면 품값을 요구하고, 나를 위해 다리품을 팔면 수고비를 요구하며, 나를 위해 사역하면 사역비를 요구하고, 나에게 빨래를 해 주면 세탁비를 요구하며, 교회에 공급하는 일을 하면 몸보신 비용을 요구한다. 말하는 자는 강의료를 요구하고, 책을 배부하는 자는 책 배부 비용을 요구하며, 글을 쓰는 자는 원고료를 요구한다. 심지어 내게 책망받은 사람은 내게 보상금을 요구하고, 집으로 돌려보낸 사람은 명예 훼손 배상금을 요구하며,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혼수비와 청춘을 바친 대가를 요구한다. 또한 닭 잡은 사람, 요리를 만든 사람, 국을 끓인 사람 등 다 그에 따른 수고비를 요구한다. 이런 것들이 바로 너희의 고상하고도 위대한 인성이며, 너희의 그 따뜻한 양심에서 비롯된 일이다. 너희의 이성은 어디에 있느냐? 너희의 인성은 어디에 있느냐?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너희가 계속 이렇게 한다면, 나는 더 이상 너희들 가운데서 사역하지 않을 것이고,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에게 사역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희 같은 인면수심의 무리들 때문에 고통받지 않을 것이고, 구원할 여지가 조금도 없는 이런 짐승들을 위해 인내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등을 돌리는 날은 바로 너희가 죽는 날이고, 어둠이 너희에게 임하는 날이며, 광명이 너희를 버리는 날이다.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나는 너희처럼 짐승보다도 못한 무리에게 큰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하고 일하는 데는 나만의 기준이 있다. 너희의 인성과 양심이 이러하니 나는 더 많은 사역을 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너무 양심이 없고, 나의 마음을 너무 많이 상하게 했으며, 너희의 비열한 행위는 나를 너무 역겹게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성과 양심이 없는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을 기회가 없다. 나는 이렇게 흉악하고 잔인한 사람들을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날이 올 때, 나는 나를 크게 진노하게 했던 이 패역한 자식들에게 영원히 불사름의 불을 쏟을 것이고, 예전에 나를 욕하고 저버린 이 짐승들에게 영원히 징벌을 내릴 것이며, 나와 함께 먹고 함께 지냈지만 나를 믿지 않고 모욕하고 배반한 그 패역한 자식들을 영원히 나의 분노의 불길로 태울 것이다. 나를 분노하게 한 모든 사람을 나의 징벌 속에 내던질 것이고, 나와 동등해지고 싶어 하며 나를 전혀 경배하지 않고 내게 순종한 적이 없는 짐승들에게 나의 모든 분노를 쏟을 것이며, 내 입에서 나온 말의 비밀과 나의 보살핌을 누리고 나에게서 물질적인 누림을 다투었던 짐승들을 나의 채찍으로 칠 것이다. 나는 내 지위를 빼앗으려는 자는 그 누구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나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다투는 자는 그 누구도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지금은 별 탈 없이 평안하고, 점점 더 큰 욕심을 내며 내게 요구하고 있지만, 분노의 날이 오면 더는 내게 요구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 나는 너희가 마음껏 ‘누리게’ 할 것이다. 나는 너희가 입으로 진흙을 씹게 할 것이고, 너희는 영원히 그 처지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조만간 이 빚을 너희에게 모두 ‘되갚을’ 것이다. 그날이 올 때까지 너희가 참을성 있게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란다.

이 비열한 인간들이 정말로 사치스러운 욕망들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설 수 있다면 그래도 구원의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에게 정말로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은 사람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얻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감정이 있어서도, 사람이 얻는 것을 하나님이 원치 않아서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 사람에게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 중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이가 있더냐? 이성이 건전하고 양심이 예민한 사람 중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이가 있더냐?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섬긴 사람 중에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 불사름 당한 이가 있더냐? 하나님께 기꺼이 순종한 사람 중에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 집 밖으로 쫓겨난 이가 있더냐? 하나님을 한없이 사랑하는 사람 중에 하나님의 징벌 속에서 살게 된 이가 있더냐?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린 사람 중에 빈털터리가 된 이가 있더냐? 사람은 하나님을 추구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자기 재물을 쓰려고 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위해 자기 일생의 정력을 쓰려고 하지 않으면서 도리어 하나님이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고, 하나님께 사람의 생각에 맞지 않는 점이 너무 많다고 말한다. 너희 같은 이런 인성으로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설령 모든 힘을 다 쏟아부어도 하나님께 칭찬받을 수 없다. 너희는 자신이 인류 중의 불량품이라는 사실을 모른단 말이냐? 너희의 인성이 가장 비천하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냐? 너희의 ‘존칭’이 무엇인지 모른단 말이냐?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너희를 늑대의 아비나 어미, 늑대의 자식이나 손자, 늑대의 후예, 늑대의 민족이라고 한다. 너희는 자기 신분을 알고 항상 마음에 새겨야 하며, 스스로를 상등 인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인류 가운데 가장 악랄한 한 무리의 비인류이다. 너희는 이 모든 것을 모른단 말이냐? 내가 너희들 가운데서 사역하면서 얼마나 큰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지 너희는 알고 있느냐? 너희의 이성이 정상을 되찾지 못하고, 너희의 양심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한다면, 너희는 ‘늑대’라는 호칭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고, 저주와 징벌의 날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너희는 출생이 비천하고, 본래 아무런 가치도 없으며, 본래 한 무리 굶주린 늑대이고, 한 무더기 잡동사니나 쓰레기다. 내가 너희에게 사역하는 것은 너희처럼 이득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역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계속 이렇게 거역한다면 나는 나의 사역을 그만둘 것이며, 앞으로 다시는 너희에게 사역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나는 내가 좋아하는 다른 무리의 사람들에게 옮겨 가서 사역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영원히 너희를 떠나게 된다. 나는 나와 적이 되는 사람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는 나의 마음에 합하길 원하느냐, 아니면 나와 적이 되길 원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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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하신 하나님 말씀 낭송 <성품이 변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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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3/2020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매일의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발췌문 48)



욥은 사탄을 이겨 하나님 눈에 진정한 사람이 되었다

욥은 처음의 시련에서 모든 재산과 자녀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로 인해 무너지지 않았고, 하나님께 죄를 짓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사탄의 시험을 이겨 냈고, 재산과 자녀 그리고 몸을 제외한 모든 것을 잃는 시련을 이겨 냈다. 다시 말해, 욥은 하나님이 그의 소유를 거두어 간 것에도 순종할 수 있었으며, 그로 인해 감사와 찬양까지 드릴 수 있었다. 이것이 욥이 사탄의 첫 번째 시험에서 보여 준 것이며, 또한 욥이 하나님의 첫 번째 시련에서 증거한 것이다. 두 번째의 시련에서 사탄은 손을 뻗어 욥에게 갖은 해를 가했다. 욥은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고통을 겪었을지라도 그의 증거는 오히려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그는 그의 강인함과 믿음,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경외심으로 또 한 번 사탄을 물리쳤다. 그리고 그가 보여 준 것과 증거한 것 역시 또 한 번 하나님께 인정받고 열납되었다. 이번 시험에서 욥은 자신의 실제 행동을 통해 사탄에게 선포했다. 육체의 고통으로도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과 순종을 변하게 할 수 없으며,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과 경외심을 빼앗아 갈 수 없다고 선포한 것이다. 또한 죽음에 이르렀어도 하나님을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며, 자신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버리는 일 또한 없을 것이라고 선포한 것이다. 욥의 의연함을 본 사탄은 겁이 났다. 욥의 믿음으로 사탄은 두렵고 간담이 서늘해졌으며, 사탄과 사생결단하겠다는 욥의 기세를 보고 침통해졌다.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에 사탄은 속수무책이 되었다. 그래서 사탄은 욥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욥을 참소하는 짓을 그만두었다. 이것은 욥이 세상을 이기고, 육체를 이기고, 사탄을 이기고, 사망을 이겨 하나님께 속한 완전한 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욥은 그 두 차례의 시련 속에서 굳게 섰으며,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실제로 살아 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그의 생존 법칙의 범위 역시 확장될 수 있었다. 그 두 번의 시련을 겪은 후, 욥은 인생에 더욱 풍부한 경험이 생겼다. 이 ‘경험’으로 인해 그는 더 성숙해지고 원숙해졌으며, 더 강인해지고 더 믿음 좋은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또한, 자신이 지키고 있는 순전함의 정확성과 가치를 확신하게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준 시련으로 욥은 사람을 염려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느끼게 되었으며, 하나님 사랑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로부터 욥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 하나님에 대한 헤아림과 사랑이 더 추가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준 시련에 욥은 천 리 밖으로 밀려 나가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더 가까워졌다. 욥은 육체의 고통이 극한에 달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보살핌을 느끼게 되면서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게 되었다. 그런 모습은 욥이 일찍이 계획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헤아림과 사랑으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자연스러운 발현이었다. 욥의 그 ‘자연스러운 발현’은 하나님에 대한 헤아림과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해, 욥은 자신을 미워했고, 하나님이 고통받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헤아림과 사랑으로 자기 자신을 잊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때의 욥은 오랜 세월 하나님을 우러러보고 사모하고 그리워하던 데서 헤아리고 사랑하는 경지로 자신을 승화시켰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 순종과 경외심을 헤아림과 사랑으로 승화시켰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께 조금이라도 상처 주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그 어떤 행동도 용납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으로 인해 하나님이 슬퍼하거나 상심하는 것은 물론, 괴로워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눈에 욥은 여전히 변함없는 욥이었지만, 그의 믿음과 순종,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하나님은 완전한 만족과 기쁨을 얻게 되었다. 그때의 욥은 하나님이 기대했던 완전함에 이르렀으며, 하나님 눈에 명실공히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었다. 욥은 자신의 의로운 행동으로 사탄을 이겼고, 하나님 앞에서 굳게 섰으며, 온전하게 되었고, 자신의 생명 가치를 승화시켰으며, 초월하게 되었다. 또한, 더 이상 사탄에게 공격받지 않고 시험당하지 않는 사람의 첫 사례가 되었다. 욥은 의로움으로 인해 사탄에게 참소당하고 시험당했으며, 의로움으로 인해 사탄의 손에 넘겨졌고, 또한 의로움으로 말미암아 사탄을 이기고 사탄을 물리쳤으며 굳게 섰다. 그로부터 욥은 더 이상 사탄에게 넘겨지지 않는 첫 번째 사람이 되었으며, 진정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빛 속에서 살고, 사탄의 감시와 해가 없는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살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눈에 진정한 사람이 되었고, 자유로워졌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 🌷 📖 🌹 📖


⭐ 하나님 말씀 더보기:


➤ 매일의 하나님 말씀 <네가 예수의 영체를 볼 때는 하나님이 이미 하늘과 땅을 새롭게 바꾼 후이다>(발췌문 286)
➤ 매일의 하나님 말씀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발췌문 98)

➤ 매일의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발췌문 35)






6/24/2020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매일의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발췌문 50)



시련 속에서 보여진 욥의 인성(시련 속에서 보인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남에 대해 알아보다)

욥은 재산을 약탈당하고, 자녀들이 목숨을 잃고, 종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욥 1:20). 이 구절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욥이 이 소식을 듣고 난 후 놀라지도 않고 울지도 않았으며, 소식을 알리러 온 종을 꾸짖지도 않았다. 더욱이 현장에 가서 조사하지도 않았고, 어떤 상황인지 사실 확인을 해서 일의 자초지종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잃은 재산을 아까워하거나 그로 인해 가슴 아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자녀와 가족들을 잃은 것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는 일도 없었다. 오히려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했다. 욥의 이러한 행동은 일반 사람들의 행동과 달랐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당혹감을 안겨 주었으며, 너무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가 ‘냉혈 인간’이라는 비난을 사게 되었다. 재산이 순식간에 사라져 아무것도 없게 될 때, 일반 사람들은 괴로움이나 절망감을 느낄 것이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람에게 재산은 사람이 일생 동안 흘린 피땀이며, 사람이 생존을 위해 의지해야 하는 것이고, 사람이 살아가는 희망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재산이 사라졌다는 것은 자신의 피땀 흘린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하고, 희망이 사라지고 심지어는 미래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정상인들이 재산을 대하는 태도이고, 재산과 사람의 밀접한 관계이다. 또한 사람이 재산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다수의 사람은 욥이 재산을 대하는 이러한 냉담한 태도에 대해 이해를 못 하는 것이다. 오늘 욥의 마음을 해석함으로써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의혹을 풀어 가도록 하자!

상식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욥에게 풍부한 재산을 주었으니 욥은 재산을 잃고 하나님께 죄송한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 그는 하나님이 준 재산을 제대로 간수하지도 못했고, 보살피지도 못했으며, 지키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재산이 약탈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난 욥의 첫 번째 반응은 마땅히 현장으로 달려가 각종 물건을 철저히 점검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다음,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죄를 자백했어야 했다. 그러나 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물론 그가 그러한 선택을 한 이유는 자기 나름의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욥의 마음속에는 자신의 모든 것은 다 본인이 힘들게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복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받은 복을 밑천으로 삼는 대신 자기가 지켜야 할 도를 전심전력으로 지키는 것을 삶의 원칙으로 삼았던 것이다. 욥은 하나님이 베풀어 준 복을 소중하고 감사하게 생각했지만, 더 많은 복을 탐하거나 더 가지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재산을 대하는 태도였다. 욥은 복받기 위해 무엇을 하지는 않았으며, 복이 없거나 복을 잃었다고 걱정하거나 상심하지도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베풀어 준 복으로 말미암아 지나치게 기뻐하거나 모든 것을 망각하는 일이 없었고, 항상 복을 누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도를 소홀히 하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잊는 일도 없었다. 재산을 대하는 욥의 태도를 통해, 사람들은 욥의 참된 인성을 볼 수 있다. 첫째, 욥은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물질생활에 대한 요구 기준이 아주 낮았다. 둘째, 욥은 하나님이 자신에게서 모든 것을 거두어 갈까 걱정한 적도 없고 두려워한 적도 없다. 이것은 그가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한 태도이다. 즉, 하나님이 언제 거두어 가든 혹은 하나님이 거두어 가든 가지 않든, 어떤 요구도 원망도 없었다. 그는 이유도 묻지 않았고,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하기만을 바랐다. 셋째, 욥은 본인의 재산은 하나님이 준 것이라고 생각했지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이다. 즉, 욥의 확신을 가리킨다. 욥에 대한 이상의 3가지 개괄을 통해 욥의 인성과 그가 평소에 진실로 추구한 것에 대해 확실히 알게 되지 않았느냐? 욥이 재산을 잃었을 때 그처럼 냉정한 반응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욥의 그러한 인성과 그의 추구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욥은 평소에도 그렇게 추구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준 시련 속에서도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분량과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욥이 한 이 말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도, 그가 갑작스러운 생각이 떠올라 만들어 낸 말도 아니다. 이는 그가 오랜 인생의 경험에서 보고 얻은 것이다. 하나님의 복을 바라기만 하고, 하나님이 거두어 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싫어하며 원망하는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욥의 순종은 아주 실제적이지 않으냐?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만 믿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은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욥은 아주 성실하고 정직하지 않으냐?

욥의 이성

욥은 실제 체험이 있었고 정직하고 성실한 인성을 갖추었기 때문에, 재산과 자녀를 잃었을 때 가장 이성적인 판단과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그의 이러한 이성적인 선택은 그가 평소에 추구했던 것과 하나님의 행사에 대한 인식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욥은 정직했기 때문에 만물은 다 여호와가 주재한다는 것을 믿게 되었으며, 그 믿음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알게 됨으로써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기를 원했고, 또 순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을 더욱더 진실하게 경외할 수 있었으며, 그 경외심으로 말미암아 더욱더 실제적으로 악에서 떠나게 되었다. 결국,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남으로 말미암아 온전해진 것이다. 그의 온전함은 그를 지혜롭게 만들었으며, 그를 가장 이성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성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문자적 해석은 이성과 생각이 논리에 맞아 터무니없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적절한 언행과 판단, 적절한 규범을 가진 도덕적 기준이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욥의 ‘이성적’은 그렇게 간단하게 해석될 말이 아니다. 여기서 욥이 가장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인성과 그가 하나님 앞에서 보인 행동과 관계가 있다. 욥은 정직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재를 믿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할 수도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욥은 다른 사람이 얻지 못한 인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인식을 통해, 욥은 자신에게 임한 일을 더욱 정확하게 분별하고 판단하며 정의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해야 할 일과 지켜야 할 것들을 더욱 정확하고 현명하게 선택할 수 있었다. 즉, 그의 언행과 일 처리 원칙과 방침은 맹목적이거나 충동적이거나 감정적이지 않았고, 매우 규범적이고 명확하며 아주 구체적이었다. 그는 어떤 일이 임하든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알았고, 각종 복잡한 사건의 관계들을 어떻게 균형 잡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알았다. 또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를 어떻게 지켜 나가야 할지도 알았으며, 더욱이 여호와 하나님이 복을 줄 때와 거두어 갈 때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알았다. 이것이 바로 욥의 ‘이성’인 것이다. 이러한 이성을 갖추었기 때문에, 욥은 재산과 자녀를 잃었을 때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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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 말씀 더보기:


               ➤ 매일의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발췌문 42)

               ➤ 매일의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발췌문 51)

               ➤ 매일의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발췌문 49)








매일의 하나님 말씀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발췌문 99)

매일의 하나님 말씀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발췌문 94)

매일의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발췌문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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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매일의 하나님 말씀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발췌문 99)



사탄의 ‘특수’한 신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의 여러 부분에서의 행적에 관심을 보인다. 심지어 많은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 이외에 사탄도 권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사탄도 이적을 보이고 인류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 이외에도 마음속에 사탄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있으며, 심지어는 사탄을 하나님으로 삼아 숭배하기까지 한다. 이들은 불쌍하기도 하거니와 가증스럽기도 하다. 그들이 불쌍한 것은 그들이 무지하기 때문이고, 그들이 가증스러운 것은 그들이 대역무도하고 또한 그들의 타고난 사악한 본질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너희가 권능이 무엇인지, 권능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이고 대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략적으로 말해서, 하나님 자신이 곧 권능이다. 하나님의 권능은 하나님의 지고지상함과 하나님의 본질을 상징한다. 하나님 자신의 권능은 하나님의 지위와 신분을 대표한다. 그렇다면 사탄은 자기 자신을 감히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탄은 자신이 만물을 창조하였으며, 자신이 또 만물을 주재한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있을까? 사탄은 당연히 그러지 못한다. 사탄은 만물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사탄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창조한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내지 못했으며, 생명이 있는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사탄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 없으므로 영원히 하나님의 지위와 신분을 가질 수 없다. 이것은 본질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사탄에게 하나님과 같은 능력이 있느냐? 물론 없다! 사탄이 행한 일들, 사탄이 보인 이적은 무엇이냐? 능력이 맞느냐? 권능이라 할 수 있느냐? 물론 그것도 아니다! 사탄은 사악한 흐름을 주도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교란시키고 파괴하며 방해하는 일만 일삼는다. 몇천 년 동안, 사탄이 인류에게 행한 것 중 인류를 부패(직역: 패괴)시키고 해치는 것 말고, 사람을 유혹해서 타락의 길로 가게 하거나 하나님을 버리고 죽음의 골짜기로 걸어가게 한 것 외에, 어느 것 하나 기념하거나 칭찬하고 귀히 여길 만한 것이 있느냐? 사탄에게 권세와 능력이 있었다면 인류가 사탄에 의해 타락(직역: 패괴)되었을까? 사탄에게 권세와 능력이 있었다면 인류가 사탄에 의해 해를 입었을까? 사탄에게 권세와 능력이 있었다면 인류가 하나님을 버리고 죽음의 길로 나아갔을까? 사탄에게는 권세와 능력이 없다면, 사탄이 행한 모든 것의 본질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겠느냐? 혹자는 사탄의 모든 행위가 보잘것없는 잔재주에 불과하다고 정의한다. 그러나 나는 사탄에 대한 이런 정의는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인류를 타락(직역: 패괴)시키는 사탄의 악행이 보잘것없는 잔재주일까? 사탄이 욥을 해한 그런 사악한 기세와 욥을 집어삼키려던 강렬한 욕망은 단연코 보잘것없는 잔재주로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당시를 돌이켜 보면, 욥이 소유하고 있던 엄청난 양의 소와 양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찰나의 사이에 욥의 그 거액의 재산이 모두 사라졌다. 그것이 보잘것없는 잔재주로 해낼 수 있는 것이냐? 사탄의 행위의 성격으로 볼 때, 다 파괴, 방해, 파멸, 상해, 사악, 극악, 어둠 등과 같은 부정적인 단어와 매치되고 어울린다. 그러므로 모든 정의롭지 못하고 사악한 사물의 출현은 사탄의 행위와 떼어 놓을 수 없으며, 또한 사탄의 추악한 본질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사탄이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다’ 할지라도, 아무리 거만할지라도, 야심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사탄의 파괴력이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사람을 미혹하고 타락(직역: 패괴)시키는 재능이 탁월하다 할지라도, 또한 사람을 협박하는 꼼수와 권모술수가 아무리 기발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존재하는 방식이 아무리 변화무쌍할지라도 상관없다. 사탄은 지금까지 생명 있는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내지 못했으며, 만물이 생존하는 법칙과 규율을 제정할 수도 없었고, 생명 있는 것과 생명 없는 것을 주관할 수도 주재할 수도 없었다. 우주 가운데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사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없으며, 사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것도 없다. 또한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사탄이 주재하고 주관하는 것이 없다. 반대로, 사탄은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서 존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분부와 명령에 순종해야만 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 위의 물 한 방울, 모래 한 알도 함부로 만질 수 없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 위의 개미조차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며, 하나님이 만든 인류에게는 더더욱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의 눈에 사탄은 산속의 백합만 못하고 하늘을 나는 새들만 못하며 바닷속의 물고기만 못하고 땅 위의 구더기만 못하다. 만물 가운데서 사탄의 역할은 바로 만물과 인류를 위해 기여하고,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경영 계획을 위해 기여하는 것이다. 사탄의 본성이 얼마나 독하고 본질이 얼마나 사악하든지 간에 상관없다. 사탄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분수껏 자신의 기능, 하나님을 위해 기여하는 것을 지키며 부각물이라는 역할을 잘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본질이자 본래의 위치인 것이다. 사탄의 본질은 생명과 무관하고 능력과 무관하며 권능과 무관하다. 사탄은 단지 하나님 수중에 있는 장난감일 뿐이며, 하나님을 위해 기여하는 하나의 기계에 불과한 것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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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 말씀 더보기: 

                  ➤ 매일의 하나님 말씀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발췌문 94)

                 ➤ 매일의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발췌문 42)

                 ➤ 매일의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발췌문 51)




6/23/2020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매일의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발췌문 42)


⭐ 욥의 반응

(욥 1:20~21)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욥이 자신의 모든 소유를 자발적으로 돌려 드린 것은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말했다.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이 말씀이 끝나자 사탄은 물러갔고, 곧이어 욥은 갑작스러운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먼저 소와 나귀를 빼앗기고, 종들이 살해당했다. 이어서 양 떼들과 종들이 불에 타 죽었다. 그 후에 낙타를 약탈당하고, 종들이 죽임을 당했다. 마지막으로 그의 자녀들도 목숨을 잃었다. 이것은 욥이 처음으로 받은 시험이었고 이러한 일련의 공격에 그는 고통을 받았다. 이 공격에서 사탄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욥의 재산과 자녀들만 목표로 삼았으며, 욥 본인에게는 해를 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욥은 거액의 재산을 가진 엄청난 부자에서 순식간에 빈털터리가 되었다. 이런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충격은 그 어떤 사람도 감당할 수 없고, 정면으로 직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욥은 비범한 일면을 보여 주었다. 성경에는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욥이 재산과 자녀를 잃고 난 후에 보인 첫 번째 반응이었다. 우선, 욥은 놀라지 않았고 당황하지도 않았으며, 분노와 증오는 더더욱 없었다. 여기에서 욥이 마음속으로 이 모든 재앙이 결코 우연이 아니고, 사람에게서 비롯된 일이 아니며, 보응이나 징벌이 임한 것도 아니라, 여호와가 주는 시련이 자신에게 임한 것이고, 여호와가 자신의 재산과 자녀를 거두어 간 것임을 확신했음을 알 수 있다. 이때의 욥의 마음은 매우 차분했으며, 정신도 매우 맑았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한 인성을 갖추었기 때문에 매우 이성적이고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닥친 재앙에 대해 정확한 판단과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보통 때와 다른 냉정함을 보여 주었다. 즉,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했던 것이다. ‘겉옷을 찢었다’는 것은 그가 벌거숭이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음을 의미하고, ‘머리털을 밀었다’는 것은 갓 태어난 아기처럼 하나님 앞에 돌아가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땅에 엎드려 경배했다’는 것은 그가 벌거숭이로 세상에 왔고 지금도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며, 갓난아기처럼 자신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욥이 자신에게 닥친 그 모든 일을 대한 태도는 그 어떤 피조물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여호와에 대한 그의 믿음은 믿음의 차원을 넘어섰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와 순종이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내린 복에 감사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거두어 간 것에 대해서도 감사했으며, 더욱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심지어 목숨까지도 자발적으로 돌려 드릴 수 있었다.

욥이 보여 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순종은 인류의 모범이다.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은 사람들이 갖춰야 할 최고 수준의 인성이었다. 욥은 하나님을 보지 못했을지라도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체험하였다. 그는 자신의 체험으로 인해 하나님을 경외했으며,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인해 하나님께 순종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이 그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거두어 가도 전혀 원망하는 바가 없었으며, 게다가 땅에 엎드려 하나님이 자신의 육체를 당장 거두어 가더라도 그 어떤 원망도 없이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욥의 이러한 모든 반응은 그의 순전하고 정직한 인성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즉, 욥은 순수하고 정직하며 선하기 때문에 자신이 체험하고 느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굳게 믿으며 흔들리지 않았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욥은 하나님의 인도와 만물을 통해 보게 된 하나님의 행사에 따라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생각과 행실, 태도와 일 처리 원칙을 자신에게 요구하고 규범화했다. 오랜 시간 그렇게 하면서 욥은 자신의 체험으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진실하고 실제적인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 아울러, 악에서 떠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욥이 고수한 ‘순전함’의 유래이다. 욥은 정직하고 단순하며 착한 인성을 갖췄고,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악에서 떠난 실제 체험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욥은 사탄의 이 같은 공격 속에서도 굳게 설 수 있었으며, 또한 하나님이 주는 시련이 닥쳤을 때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고 만족스러운 답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의 시험에서 욥은 아주 ‘단순’하게 반응했었지만, 후세 사람들은 평생의 심혈을 기울여도 욥이 해냈던 그 ‘단순’한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고, 욥이 보여 준 그 모습도 갖출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지금 욥의 그 ‘단순’한 반응을 보고, 오늘날 말로만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표명한 ‘절대 순종, 죽기까지 충성’이라는 구호나 결심을 그것에 비교해 보면, 너희는 매우 부끄럽지 않으냐?

너는 성경에 기록된 욥의 집에 닥친 이 모든 상황을 보았을 때, 어떤 반응이 있었으냐? 많은 생각이 들지 않았느냐? 매우 놀라지 않았으냐? 욥이 맞닥뜨린 시련은 ‘끔찍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지 않으냐? 다시 말해서, 글로 묘사된 내용만 봐도 욥에게 시련이 임했을 때의 장면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하물며 실제 현장은 어떠했겠느냐? 이로써 욥에게 임한 것은 ‘연습’이 아니라 ‘실제 총탄을 든 정규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게 임한 그 시련은 도대체 누가 직접 한 것이냐? 물론 사탄이 한 것이다. 사탄이 직접 한 것은 맞으나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어떤 방식으로 욥을 시험하라고 했느냐? 말씀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조건을 하나 제시했을 뿐이다. 그러나 욥에게 그런 시험이 임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욥에게 닥친 시험을 통해 사탄의 사악함과 추함과 악독함, 그리고 사탄이 사람을 증오하고 하나님을 적대시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여기에서 이번 시험의 잔인함 정도가 말로는 형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을 해치는 사탄의 악독한 본성과 추한 몰골이 이때 낱낱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사탄은 이러한 기회, 하나님이 허락한 이러한 기회를 빌미로, 욥에게 가차 없이 미친 듯이 해를 가했다. 그 해치는 수단과 잔인함의 정도는 지금의 사람들이 상상하지도 못하고 전혀 견뎌 내지도 못할 정도였다. 욥이 사탄의 시험을 당하며 그 시험 속에서 굳게 섰다고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준 시련 속에서 자신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지키기 위해 사탄과 대결을 벌였다고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 대결에서 욥은 가득했던 소와 양을 잃었고 재산 전부와 자녀까지 잃었다. 하지만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버리지 않았다. 즉, 그는 사탄과의 대결에서 재산과 자녀를 잃을지언정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지키고, 사람됨의 근본을 지키려고 하였다. 성경에는 욥이 재산을 잃는 전 과정과 욥의 반응과 태도가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다. 간단명료한 묘사에 욥이 그 시험에 아주 ‘쉽게’ 직면했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실제 장면과 사탄의 악독한 본성을 결부시켜 보면, 이 몇 마디로 묘사한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거나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 장면은 이보다 훨씬 더 처참하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인류를 대하고 하나님이 칭찬하는 사람을 대하는 잔인함과 증오의 정도이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의 몸에 손대지 말라는 요구를 하지 않았다면, 사탄은 분명 사정없이 욥을 사지로 몰았을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지 않으며, 하나님 눈의 의인이나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 사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다는 것은 사탄을 멀리하고 저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탄은 하나님이 허락한 이 기회를 이용해서 모든 분노와 증오를 사정없이 욥에게 쏟은 것이다. 이것으로 욥이 육체와 마음, 외적 내적으로 받은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지금 당시의 장면을 볼 수 없고, 그저 성경의 기록을 통해 욥이 고통받았을 당시의 심정을 미미하게 느낄 수 있을 뿐이다.

⭐ 욥이 지킨 순전함에 사탄은 수치를 당하고 황급히 도망갔다

욥이 이러한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였을까? 하나님은 감찰하고 살펴보았으며, 또한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님은 감찰하고 살펴보면서 심정이 어땠을까? 당연히 몹시 마음 아팠다. 하나님은 마음이 아파서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라고 허락한 것을 후회했을까?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탄에게 하나님 앞에 있는 욥이 의롭다는 것을 확인할 기회를 주었을 뿐이다. 또한, 사탄에게 그것의 사악함과 비루함을 드러낼 기회를 준 것이다. 더욱이 욥에게는 세상 사람들과 사탄, 나아가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하고,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궁극적으로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틀림없이 정확하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았느냐? 사실, 욥이 사탄을 이긴 것이 아니냐? 여기에 욥이 한 가장 멋진 말이 있다. 그 말이 바로 욥이 사탄을 이겼다는 증거이다. 그가 말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이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욥의 태도이다. 이어서 욥은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고 말했다. 욥에게서 나온 이런 말들로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하며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또한, 하나님의 칭찬은 틀리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칭찬한 그 사람이 의인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이 말은 하나님에 대한 욥의 증언이다. 바로 이처럼 평범한 말 한 마디에 사탄은 간담이 서늘해졌고, 수치를 당해 황급히 도망가게 되었으며, 속수무책이 되었다. 욥의 이 한 마디에서 사탄은 여호와 하나님의 행사가 얼마나 놀랍고 위력이 있는지 보게 되었으며, 마음속에 하나님의 도가 권세 잡고 있는 사람의 비범한 매력도 보게 되었고, 보잘것없는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지키기 위해 발산되는 강력한 생명력도 보게 되었다. 첫 번째 대결에서 사탄은 이렇게 패했다. 사탄은 이 사건으로 ‘시야를 넓히게’ 되었지만 욥에 대해 손을 놓을 생각은 없었다. 사탄의 악독한 본성 역시 이로 인해 변하지는 않았다. 사탄은 계속해서 욥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기 위해 또 하나님 앞에 오게 되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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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 말씀 더보기:

   ➤ 매일의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발췌문 51)

   ➤ 매일의 하나님 말씀 <3단계 사역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길이다>(발췌문 11)

   ➤ 매일의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발췌문 49)




6/21/2020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매일의 하나님 말씀 <너는 아느냐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매우 큰 일을 하였다는 것을>(발췌문 132)


이번에 온 하나님은 영체가 아닌 아주 평범한 몸으로 사역한다. 그 몸은 하나님이 두 번째로 성육신한 몸이며, 또한 하나님이 다시 육신을 입고 돌아온 몸이고, 아주 평범한 육신이다. 너는 그에게서 남다른 점을 찾을 수 없으나 지금까지 들어 본 적이 없었던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이 보잘것없는 육신은 하나님이 하는 모든 진리의 말씀의 화신이고, 하나님이 하는 말세 사역의 담당자이며, 또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나타내 알게 하는 존재다. 너는 하늘의 하나님이 몹시 보고 싶지 않았더냐? 너는 하늘의 하나님을 몹시 알고 싶지 않았더냐? 너는 인류의 종착지를 몹시 보고 싶지 않았더냐? 그는 지금껏 아무도 알려 주지 못했던 이 모든 비밀을 너에게 알려 줄 것이고, 또한 네가 깨닫지 못한 진리도 알려 줄 것이다. 그는 너를 하나님나라로 들어가게 하는 대문이자 너를 새 시대로 이끄는 인도자다. 이런 평범한 육신에 사람이 헤아릴 수 없는 비밀이 많이 깃들어 있다. 그의 행사는 네가 분명하게 측량할 수 없지만, 그가 행하는 사역의 모든 목표를 통해 너는 그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범한 육신이 아님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세의 뜻을 대변하고, 말세의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염려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너는 천지를 진동하는 듯한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없고, 불꽃 같은 그의 두 눈을 볼 수 없으며, 그의 철장(鐵杖)의 다스림을 받을 수는 없다. 하지만 너는 그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분노를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이 인류를 긍휼히 여기고 있음도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과 하나님의 지혜도 엿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온 인류를 염려하는 하나님의 마음도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은 말세 사역을 통해 땅에서 사람들에게 하늘의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생활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그가 다시 육신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보게 되는 것은 사람과 다름없는 하나님, 눈과 코가 달린 하나님, 아주 보잘것없어 보이는 하나님이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하나님은 너희에게 이 사람이 존재하지 않으면 천지가 크게 변하고, 이 사람이 존재하지 않으면 하늘이 어두워지고 땅이 혼돈에 빠지며, 인류가 기근과 전염병 속에서 살게 될 것임을 보게 할 것이다. 또 말세에 성육신한 하나님이 너희를 구원하러 오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진작에 모든 사람을 지옥에 멸했을 것이고, 이 육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영원한 죄수이자 영원한 시체임을 보게 할 것이다. 너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육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온 인류는 큰 재난을 피하기 어렵고, 말세에 하나님이 인류에게 내리는 더 무거운 징벌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을 말이다. 또한 이 평범한 육신이 강생하지 않았다면, 너희는 살고 싶어도 살 수가 없고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을 것이고, 이 육신이 존재(원문: 存活)하지 않는다면, 오늘날 너희는 진리를 얻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올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무거운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너희는 알고 있느냐? 하나님이 육신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구원받을 기회가 없고, 또한 이 육신이 오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옛 시대를 벌써 끝냈을 것이다. 이러한데도 너희는 하나님의 두 번째 성육신을 거절할 수 있겠느냐? 이 평범한 사람이 너희에게 이렇게 유익한데도 너희는 왜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하느냐?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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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0/2020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교회생활간증 동영상 <본분을 통해 얻은 것> 기독교 영상


주인공 양명진은 한때 공장을 운영하는 사장으로 가족들과 친구들 눈에는 잘나가는 '슈퍼우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게 된 후 그녀는 열정적으로 살았고 교회 본분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실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형제자매를 섬기고 대접하라는 본분을 배정받자 겉으로는 받아들이는 척했지만 속으론 반감이 들고 뒤집어지는 듯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접대 본분은 중요해 보이지도 않고 무시만 당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 본분을 배정받은 주인공은 진심으로 순종할 수 있을까요? 주인공은 결국 어떤 수확을 얻게 됐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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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9/2020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매일의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발췌문 52)



하나님이 욥을 사탄에게 넘긴 것과 하나님 사역의 근본 취지와의 관계

비록 이때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인정하고, 또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것을 인정했을지라도, 욥을 인정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더 알게 된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은 욥의 인성과 그가 추구하는 바를 부러워하는 동시에, 하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했다. ‘욥이 이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며, 이처럼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데 왜 하나님은 그를 사탄에게 넘겨서 그런 고통을 받게 하셨을까?’ 이러한 질문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의문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질문이라는 것이다. 이 질문이 다수의 사람들에게 곤혹스러움을 느끼게 한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명확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하나님이 행하는 모든 일은 다 그 필요성이 있으며, 또한 다 평범하지 않은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그가 사람에게서 하는 일들은 다 그의 경영과 관련되며, 인류의 구원과도 관련되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이 욥에게 행한 일도 예외는 아니다. 욥이 하나님 눈의 순전하고 정직한 자임에도 말이다. 즉, 하나님이 어떻게 하고 어떤 방식으로 하든지, 무엇을 대가로 삼고 무엇을 목표로 하든지 간에, 그가 하는 사역의 근본 취지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근본 취지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요구, 그리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 즉 하나님이 보기에 긍정적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들을 다 하나님의 절차에 따라 사람 마음에 심어 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본질을 명확하게 알며,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행하는 사역의 근본 취지 중 하나이다. 또 한편으로 사탄은 하나님 사역의 부각물이자 봉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은 항상 사탄에게 넘겨진다. 하나님은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사탄의 시험과 공격 속에서 사탄의 사악함과 추함과 비열함을 보게 함으로써 사탄을 증오하고 부정적인 것을 인식하고 분별하게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람은 점차 사탄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사탄의 참소, 교란과 공격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순종,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경외심에 기대어 사탄의 공격과 참소를 완전히 이기면, 사람은 완전히 사탄의 권세에서 구출된다. 사람이 구출됐다는 것은 사탄이 패했다는 선언이며, 그 사람은 더 이상 사탄의 먹이도, 사탄이 삼키려고 하는 대상도 아닌 사탄이 포기하는 대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람은 정직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과 경외심을 가지고 있으며, 사탄과 철저하게 결별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사탄에게 수치를 주고, 사탄의 간담을 서늘케 하며, 또한 사탄에게 완전한 실패를 안겨 준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따르는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경외심으로 사탄을 물리쳐, 사탄으로 하여금 그에 대해 확실히 손을 놓게 만든다.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이 진정으로 얻고자 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최종 목표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고 완전히 하나님께 얻어지고자 한다면, 반드시 사탄으로부터 오는 크고 작은 시험과 공격에 직면해야 한다. 그리고 완전히 사탄을 이기고 거기에서 나오는 사람이 바로 구원받은 자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준 시련과 사탄의 무수한 시험과 공격을 겪은 사람이다. 하나님께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요구를 아는 자요,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고 사탄의 시험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포기하지 않은 자다. 하나님께 구원받은 자는 정직하고, 선하고, 애증이 분명하고, 정의감이 있고, 이성이 있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하나님의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사탄의 속박, 염탐, 참소, 상해 등이 없으며, 거기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유를 얻은 자이고, 완전히 해방받은 자이다. 욥이 바로 이러한 자유인이었다. 이 또한 하나님이 욥을 사탄에게 넘긴 의미이기도 하다.

욥은 사탄의 상해를 겪었지만 영원히 자유로운 해방을 얻었다. 그는 영원히 사탄에 의해 패괴되지 않고 상해와 참소를 받지 않으며, 어떤 우려도 걱정도 근심도 없이 하나님의 얼굴빛 속에서, 하나님이 베풀어 주는 복 가운데서 살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이 권리는 아무도 빼앗을 수 없고, 아무도 파괴할 수 없으며, 아무도 차지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권리는 욥이 자신의 믿음과 의지,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경외심으로 바꾼 것이다. 그는 목숨을 대가로 땅에서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삶을 얻었으며, 진정한 피조물로서 천경지위(天經地緯)로 땅에서 그 어떤 간섭도 받지 않고 창조주를 경배할 자격과 권리를 얻었다. 이 역시 욥이 시험을 겪어 얻은 가장 큰 성과이다.

구원받기 전의 사람의 삶은 항상 사탄의 방해를 받으며, 심지어 그 삶은 사탄에게 통제받는 삶이다. 즉,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는 사탄에게 구금된 자이고, 자유가 없는 자이며, 사탄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하고 하나님을 경배할 자격과 권리가 없는 자이며, 사탄에게 쫓기고 심한 공격을 받는 자이다. 이러한 사람은 행복을 논할 수도 없고, 정상적인 생존 자격은 물론이고 존엄성에 대해서는 더더욱 말할 수도 없다. 사람이 스스로 일어나 사탄과 싸워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과 경외심을 무기로 사탄과 결사전을 벌여 철저히 물리쳐야 한다. 그리하여 사탄이 너를 보면 도망가고 너를 보면 간담이 서늘해지게 해야 한다. 그러면 사탄이 너에 대한 공격과 참소를 완전히 포기할 것이다. 그때 너는 구원받아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네가 사탄과 철저히 결별할 결심만 하고 사탄을 물리칠 수 있는 유리한 무기를 갖고 있지 않다면, 너는 여전히 아주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면, 너는 사탄으로부터 오는 괴롭힘으로 인해 완전히 기진맥진해서 굳게 서지도 못하고, 사탄의 참소와 공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도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네가 구원받을 희망은 요원해진다. 최종, 즉 하나님의 사역이 마지막을 고하게 될 때에도 네가 여전히 사탄에게 꽉 잡혀 벗어나지 못한다면, 너는 영원히 기회도 희망도 없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러한 사람은 완전히 사탄에게 사로잡힌 것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 하나님의 말씀 더보기:


     ✔ 매일의 하나님 말씀 <그리스도의 본질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발췌문 106)

     ✔ 매일의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발췌문 37)

     ✔ 매일의 하나님 말씀 <그리스도는 진리로 심판의 사역을 한다>(발췌문 77)






6/16/2020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찬양<진리를 추구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솔로 찬양)


지금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현실적인 것이다
자신의 패괴 본성을 아는 것
진리를 깨닫고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는 것
본분을 잘 이행해 하나님 흡족게 하는 것
진리 실제에 진입해 진정한 사람의 모습으로 사는 것
하나님 사랑하고 순종하고 증거하는 것
이것이 현실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 몇 가지 결실을 원한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일들은 연구해 봤자 소용없고
현실과도, 하나님 사역의 결실과도 관련이 없다
진정 총명한 자는
하나님이 어찌 하든,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
자신이 얼마나 깊이 패괴되었고, 인성이 어떻든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 알기를 추구할 것이다!
하나님을 알아야 패괴 성품을 해결할 수 있고
본분을 잘 이행해 하나님을 흡족게 할 수 있다
이것이 인생의 방향이자
사람이 마땅히 추구해 도달해야 할 바이며
구원받는 유일한 길이다
구원받는 유일한 길이다

― ≪어린양을 따르며 새 노래 부르네≫


🍦🍧🍨🍹🍨🍫


🎀 워십 찬양 더보기:

  ➤ 워십 찬양<사람의 패역함은 하나님을 진노케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솔로 찬양)

  ➤ 워십 찬양<하나님은 네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가>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솔로 찬양)

  ➤ 워십 찬양 뮤직비디오/MV <하나님은 시작이자 끝이라> (영어 찬양)





6/11/2020

매일의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역으로 맺게 될 결실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발췌문 6)



사람의 생각은 진리를 대신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고난과 괴로움을 참고 견디며 대가를 치르고 외적 행위가 아주 좋아 사람에게서 존경을 받고 감탄을 자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외적 행위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한다고 확정할 수 있느냐? 왜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보면 흔히 그가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진리를 실행하는 길을 가고, 하나님의 도를 지키고 있다고 여기느냐? 왜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냐? 거기에는 한 가지 이유밖에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 진정으로 진리의 실제가 있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 등의 문제에 대해 아직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종종 겉으로 보았을 때 영적이고 고상해 보이는 사람, 이미지가 괜찮은 사람에게 미혹된다. 사람들은 글귀 도리를 말하고, 말과 행동이 다른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그런 사람들의 일을 하는 본질과 원칙, 일을 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또 그런 사람들이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하는지,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는지는 살피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의 인성 본질을 전혀 분별하지 않는다. 그 대신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점점 익숙해지면서 조금씩 탄복하고 우러러보다가 나중에는 그 사람들을 자신의 우상으로 삼는다. 게다가 일부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숭상하는 우상,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가정과 직장을 내려놓고 대가를 치르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사람, 참으로 좋은 결말과 좋은 종착지가 있을 사람, 하나님이 칭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에게 존재하는 이런 ‘생각’은 어떤 원인으로 초래된 것이냐? 이 일의 본질은 무엇이냐? 이 일로 초래된 결과는 무엇이냐? 먼저 이 일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앞에서 언급한 사람의 관점과 실행법, 사람이 스스로 취한 실행 원칙, 그리고 사람들이 평소에 중시하는 것들은 본질적으로 모두 하나님의 요구와 무관하다. 사람이 중요시하는 것이 깊든 얕든, 글귀의 이치이든 실제이든, 결론적으로 말해서 사람은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했고,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했다. 그 원인을 따져 보면, 사람이 진리를 전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실행 원칙을 찾아 실행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도리어 지름길로 가면서 자기 자신이 생각하고 있고 알고 있는 좋은 행위와 방법을 종합해 그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아 추구하고, 진리로 삼아 실행하고 있다. 이렇게 했을 때 직접적으로 초래되는 결과는 바로 사람이 인위적인 좋은 행위로 진리 실행을 대체하게 되고, 동시에 하나님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욕망을 충족시키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사람에게는 진리에 대항하는 밑천, 하나님과 이치를 따지며 맞서는 밑천이 생기게 된다. 그와 동시에 사람은 서슴없이 하나님을 한쪽에 제쳐 놓고 자신의 마음속 우상을 하나님 자리에 놓는다. 사람에게 이런 미련한 행위와 우매한 사고방식, 혹은 단편적인 사고방식과 실행법이 생기게 된 근본 원인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을 오늘 알려 주겠다. 그 원인은 바로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면서 날마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있어도 사실상 하나님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한 데에 있다. 이것이 문제의 근원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이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혐오하는지, 무엇을 얻으려고 하고 무엇을 버리려고 하는지,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을 싫어하는지, 어떤 기준으로 사람에게 요구하고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온전케 하는지를 안다면, 사람에게 자신만의 생각이 있을 수 있겠느냐? 또 멋대로 다른 사람을 숭상할 수 있겠느냐? 또 일반 사람을 자신의 우상으로 삼을 수 있겠느냐? 만약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사람의 견해는 다소 이성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패괴된 사람을 함부로 자신의 우상으로 삼지 않을 것이고, 진리를 실행하는 길에서 제멋대로 몇 가지 간단한 규례나 원칙을 지키는 것을 진리 실행으로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6/08/2020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매일의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역으로 맺게 될 결실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발췌문 7)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기준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갖고 있다

모든 사람의 관심이 자신의 결말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너희는 하나님이 사람의 결말을 어떻게 정하는지 알고 있느냐? 하나님은 한 사람의 결말을 어떤 방식으로 정할까? 어떤 기준으로 한 사람의 결말을 정할까? 사람의 결말이 아직 정해지기 전, 하나님은 어떤 사역들을 하여 사람의 결말을 드러낼까? 이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느냐? 내가 방금 말했다시피, 일부 사람들은 사람의 결말이 무엇인지, 사람의 결말이 어떻게 나뉘는지, 사람마다 각각 어떤 결말이 있는지, 하나님 말씀에서는 사람의 결말을 어떻게 정했는지, 하나님이 어떤 기준과 방식으로 한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지 알고 싶어서 하나님 말씀 가운데 오랫동안 연구를 해 왔다. 하지만 결국 아무 결과도 찾지 못했다. 사실 하나님 말씀에는 아주 조금만 언급되어 있을 뿐 내용이 많지 않다.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은 사람의 결말이 드러나기 전까진 그 누구에게도 최후의 결과를 알려 주기를 원치 않고, 사람의 종착지가 어떤지 미리 알려 주는 것도 원치 않는다. 사람에게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서 너희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어떤 방식을 통해 사람의 결말을 정하고 어떤 사역 원칙으로 사람의 결말을 정하고 드러내는지, 어떤 기준으로 한 사람이 살아남을지를 정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너희도 가장 관심 갖고 있는 내용이 아니냐? 그럼 사람의 관념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람의 결말을 어떻게 정하느냐? 조금 전에 너희가 일부를 얘기했다. 즉, 어떤 사람들은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고 헌신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을 흡족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배에 따르는 것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너희가 이런 진리들을 실천하고, 스스로 원칙이라 생각하는 것에 따라 실천할 때,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느냐? 너희는 너희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는 것인지,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것인지,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는 것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나는 많은 사람이 그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저 하나님 말씀의 일부, 설교의 일부, 그리고 자신이 숭상하는 일부 영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준을 따라서 적용하며 스스로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강요할 뿐이다. 마지막 결과가 어떠하든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여기며 계속 이를 고수하고 그대로 행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난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렇게 실천해 왔어. 그동안 많은 진리를 깨달았고, 지난날 몰랐던 것들도 많이 알게 됐지. 특히 사상과 관점, 인생의 가치관이 많이 바뀌고, 이 세상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됐어. 그래서 하나님을 아주 흡족게 해 드렸고 얻은 것도 적지 않은 것 같아.’ 그러면서 그것을 수확이라고, 하나님의 사역이 사람에게서 맺는 최종 결실이라고 생각한다. 너희 모든 사람이 실천하고 있는 것들을 포함한 이런 기준들을 종합해 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해 드리는 것이냐? 어떤 사람들은 확신에 차 대답한다. “물론이죠! 우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실천하고, 상부의 설교에 따라 실천하며, 계속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따르면서 지금껏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거든요.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을 흡족게 해 드리고 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이해했든,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깨달았든 결론적으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길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행한 것이 올바르다면, 결과도 틀림없이 옳을 것입니다.” 이런 관점은 어떠하냐? 올바르냐? 아마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는 이런 일들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면서 계속 하나님 말씀의 요구대로 행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할 수 있는지,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 다다랐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선 그런 걸 저한테 알려 주신 적도, 명확하게 지시하신 적도 없으시거든요. 저는 그저 쉬지 않고 행하면 하나님께서 흡족해하실 것이고, 더 이상 다른 요구는 없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은 올바르냐? 내가 봤을 때, 너희의 그런 실천과 생각, 관점에는 상상이 섞여 있고 다소 맹목적이다. 내가 이 말을 하면 낙담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맹목적이라고요? 그럼 우리가 구원을 받거나 살아남을 가망이 불투명하고 희박하다는 말인가요? 저희에게 찬물을 끼얹는 말씀 아닌가요?” 너희가 어떻게 생각하든 내가 말하려는 것과 내가 하려는 것으로 너희에게 찬물을 끼얹는 느낌을 주려는 것은 아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더욱 잘 깨닫고, 하나님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혐오하고 무엇을 증오하는지, 어떤 사람을 얻으려고 하는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싫어해 버리는 대상인지 더 확실히 알게 하는 것이다. 너희 모두의 모든 행위와 생각이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분명하고 뚜렷하게 알게 하려는 것이다. 이런 주제들에 관한 교제가 참으로 필요하지 않으냐? 나는 너희가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고 그렇게 많은 도를 들었지만 이런 부분이 가장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모든 진리를 다 기록해 두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부분은 머릿속에 기억하고 마음에 새겨 두며 준비를 해 둔다. 실천할 때가 되면 그 진리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흡족게 해 드릴 수 있도록, 수시로 필요한 것을 채울 수 있도록, 혹은 눈앞에 연이어 놓인 난관들을 극복하는 데에 도움을 받도록, 아니면 그 진리들이 너희의 삶에 함께하도록 말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너희가 어떻게 행하든 마냥 행하기만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하겠느냐? 네가 행할 때 그 행함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인지, 너의 행함과 생각과 이루려는 결실과 목표가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는 것인지,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는 것인지,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인지 아주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이것들이야말로 매우 중요하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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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6/2020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매일의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발췌문 33)


하나님은 사람의 어리석음을 보지 않고, 사람의 진심만을 원한다

창세기 22장 2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였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의 뜻은 아주 분명했다. 즉, 아브라함에게 그의 독자를 ― 그가 사랑하는 이삭을 ― 번제로 바치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행한 이 일은 지금에 와서 봐도 여전히 사람의 관념과는 어긋나지 않느냐? 그렇다! 하나님이 이때 행한 일은 사람의 관념에 매우 맞지 않는 것이며,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람은 이런 고정 관념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 믿지 못하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아들을 주셨다가 아들을 얻은 후에는 또 그 아들을 바치라고 하시다니,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야! 하나님이 대체 뭘 하시려는 거지? 하나님의 뜻은 대체 무엇일까?’ 하나님은 아무런 조건 없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었다. 그러고는 또 그에게 조건 없이 아들을 바치라고 했다. 이것은 지나친 것이냐? 제3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너무 지나칠 뿐만 아니라 조금은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정작 아브라함 본인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해 다른 생각이나 자그마한 추측은 있었지만 그래도 아들 이삭을 바칠 준비를 하였다. 여기서 너는 어떤 일에서 아브라함이 기꺼이 아들을 바치려고 했다는 것을 볼 수 있느냐? 원문에서 뭐라고 했느냐? 이같이 기록되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창 22:3),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창 22:9~10). 아브라함이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의 아들을 죽이려고 할 때, 그 모든 행동을 하나님은 보았느냐, 보지 못했느냐? 하나님은 보았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한 때부터,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정말로 그의 아들을 죽이려고 했던 그 전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보았다. 이전에 아브라함이 어리석었고 무지했으며 하나님을 오해했다 할지라도, 이때만큼은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진짜였으며 진실했다. 아브라함은 진심으로 하나님이 그에게 준 이삭을 ― 그의 아들을 ― 하나님께 돌려 드리려고 하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그의 순종을 보았으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한 것이었다.

사람이 봤을 때, 하나님이 행하는 많은 일들이 이해하기 어렵고, 심지어는 기이하게 여겨질 때도 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지배하고자 할 때, 이 ‘지배’는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으며, 또한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이자 하나님의 검증인 것이다. 아브라함에게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것이다. 이때,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요구에 ― 이삭을 바치라는 것에 ― 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인류에 대해, 즉 자신이 선택한 아브라함이란 사람에 대해 참으로 안심하였고, 그를 진정으로 인정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한 그 사람이 자신의 약속과 앞으로의 경륜을 맡아서 실행해 나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주된 인물이라고 확신하였다. 비록 그 일이 시련이고 검증일 뿐일지라도 하나님은 이미 위안을 받았고, 사람이 그에게 바친 사랑을 느꼈으며, 또한 사상 처음 사람으로부터 위로를 받았다.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이삭을 죽이려고 하던 그 찰나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았느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게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애초에 이삭의 생명을 가져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행동을 바로 저지했다. 하나님이 보기에, 아브라함의 복종은 이미 시험을 이긴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가 보인 행동으로 이미 충분했으며, 자신이 하고자 한 일에서 이미 결과를 얻었다. 그 결과에 하나님은 만족스러워하지 않았느냐? 그 결과에 하나님은 만족하였고, 그것은 하나님이 원한 것이며 하나님이 보고자 기대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냐? 비록 하나님이 다양한 배경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각 사람을 검증한다 할지라도, 아브라함에게서 하나님은 자신이 원했던 것을 보았고, 아브라함의 마음이 진심인 것을 보았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무조건적인 것이었고, 이 ‘무조건’이 바로 하나님이 원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이미 이것을 바쳤어. 나는 이미 그것을 포기했어. 그런데 하나님은 왜 나에게 만족을 못 하시는 걸까? 왜 계속 나에게 시련을 주시는 거지? 왜 계속해서 나를 검증하시지?’ 이것은 한 가지 사실을 설명해 준다. 하나님은 너의 마음을 보지 못했고, 너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너에게서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죽여 하나님께 바치려고 칼을 들었던 것과 같은 그런 진심과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을 보지 못했고, 너에게서 위안을 얻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너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이 계속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냐?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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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의 하나님 말씀 더보기:

     ✔ 매일의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발췌문 31)

     ✔ 매일의 하나님 말씀 <3단계 사역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길이다>(발췌문 8)

     ✔ 매일의 하나님 말씀 <3단계 사역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길이다>(발췌문 7)

     ✔ 매일의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1>(발췌문 30)












6/03/2020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매일의 하나님 말씀 <3단계 사역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길이다>(발췌문 7)


3단계 사역은 하나님이 행한 모든 사역과 인류 구원의 실제 기록이지, 지어낸 것이 아니다. 너희가 정말로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이 행한 3단계 사역을 알아야 하며, 한 단계도 빠트려서는 안 된다. 이는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인식이다.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앎은 사람이 스스로 지어내거나 생각해 내는 것이 아니며, 성령이 특정한 한 사람에게 특별한 은총을 베푼 결과는 더더욱 아니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면서 얻은 앎이자 하나님이 사역한 사실을 체험한 후에야 생기는, 하나님에 대한 앎이다. 이런 앎은 아무렇게나 얻을 수 있는 것도, 누군가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완전히 개인의 체험과 관계되는 일이다. 이 3단계 사역의 핵심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이다. 하지만 이 구원 사역에는 또 여러 가지 사역 방식과 하나님의 성품이 발현되는 방식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은 사람이 발견하기 가장 어렵고, 받아들이기도 힘든 것이다. 시대가 나뉘고, 사역이 달라지고, 사역의 장소와 대상이 바뀌는 등등은 모두 3단계 사역에 포함된다. 특히 성령 역사의 방식 차이, 하나님의 성품과 형상, 이름, 신분 또는 다른 변화들은 모두 3단계 사역 안에 있다. 한 단계의 사역은 그저 한 부분만 대변하고 한 범주에만 국한되기에 시대의 구분은 물론, 사역의 전환이라고도 할 수 없으며, 그 밖의 다른 부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3단계 사역은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전체 사역이다. 사람은 구원 사역에서 하나님의 사역과 성품을 알아야 한다. 이 사실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알아 간다는 것은 근거 없는 헛소리이자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그런 앎은 사람을 설득할 수도, 정복할 수도 없으며, 실정에 맞지도 않고 진리도 아니다. 설령 네가 아는 것이 많고 게다가 다른 이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할 수 있을지라도 그 앎이 하나님의 고유한 성품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너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너의 앎을 칭찬하기는커녕 그를 모독한 죄를 물어 보응을 받게 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앎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네 언변이 뛰어나 청산유수 같은 말로 죽은 것을 산 것으로 둔갑시킬 수 있고, 산 것을 죽은 것이 되게 할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앎을 얘기할 때면 너는 바로 문외한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네가 마음대로 평가하거나 칭찬할 수 있는 분도, 네가 마음대로 폄하할 수 있는 분도 아니다. 너는 어떤 사람이라도 칭찬할 수 있지만, 적당한 단어로 하나님의 ‘크나큰 은덕’을 함부로 묘사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모든 실패자의 깨달음이다. 수많은 언어 전문가들이 하나님을 한바탕 묘사할지라도 그 묘사의 정확성은 오히려 언어가 풍부하지는 않지만 체험이 풍부하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설명하는 진리의 1%밖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앎에서 중요한 것은 정확성과 실제에 있는 것이지, 언어의 교묘함이나 단어의 풍부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겠다. 사람의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하나님을 알아 가는 이 공과는 인류의 그 어떤 자연 과학을 배우는 것보다 높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극소수의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지, 재능이 있다고 해서 모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추구하는 일을 개구쟁이 어린이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어쩌면 너는 가정이나 사업 또는 결혼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을 수도 있지만, 진리와 하나님을 알아 가는 이 공과에서는 백지상태로 어떤 성과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너희에게 있어 진리 실행은 큰 난제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보다 더 큰 난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너희의 애로 사항이자, 모든 인류의 애로 사항이다. ‘하나님을 아는’ 이 사업에서 성과를 거둔 사람 가운데 합격한 사람은 거의 한 명도 없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지, 도대체 어느 정도에 이르러야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는지 모른다. 이런 것들은 모두 인류의 난제이자 가장 큰 수수께끼로서 그 누구도 답하지 못하고, 또 답하기를 원치 않는 문제이다. 인류 중 지금까지 이 일을 연구하여 성과를 거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3단계 사역’의 수수께끼가 인류에게 공개되고 나면 하나님을 아는 인재들이 잇달아 나타날 수도 있다. 물론 나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게다가 지금 그 사역에 착수하고 있다. 나는 머지않은 장래에 이러한 인재가 더 많이 나와 3단계 사역의 증인이 되는 모습을 보게 되길 바란다. 다시 말해, 그들이 3단계 사역을 증거하는 창시인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사역이 끝나는 날까지 그런 인재, 즉 성육신 하나님에 의해 직접 온전케 된 사람이 없거나 한두 명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정말 가슴 아프고 애석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최악의 경우를 생각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어쨌든 나는 진심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이 이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은 천고에 없었던 사역이고, 인류 발전의 역사에서도 없었던 위업이다. 정말로 ‘하나님을 아는’ 창시인이 된다면, 그것은 피조물 가운데 가장 높은 영광 아니겠느냐? 이런 사람이 바로 인류 가운데서 하나님께 가장 칭찬받는 피조물 아니겠느냐? 이 사역을 이루기는 쉽지 않겠지만, 마지막이 되면 성과를 거둘 것이다. 성별이나 국적과는 무관하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마지막에 하나님의 가장 높은 영광을 받는 사람이자 유일하게 하나님의 권병을 받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것은 현재의 사역이자 이후의 사역이고, 6천 년 사역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이루려는 최고의 사역이며, 또한 각 부류의 사람을 드러내는 사역의 방식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알게 하는 이 사역을 통해 각 부류 사람의 등급을 드러낼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약속을 이어받을 자격이 있는 자이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거나 약속을 이어받을 자격이 없는 자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지기(知己)이고,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하나님의 지기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지기는 하나님의 어떤 축복이든 다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지기가 아니라면 그 어떤 사역도 감당할 수 없다. 환난이든 연단이든 심판이든 모두 사람이 마지막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기 위한 것이며, 이는 마지막에 거두어야 할 유일한 성과이다. 3단계 사역을 모두 공개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나아가 하나님을 더 전면적이고 철저하게 깨닫는 데 도움이 된다. 이 모든 사역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5/24/2020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말씀 찬양 CCM <어떻게 하나님과 정상 관계를 맺을까>(가사 버전)



1
하나님과의 정상적 관계는 너의 마음을 차분히 하는 데서 시작되네
그의 뜻을 깨닫지 못한다 해도 너의 본분을 이행하라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 후에 그 뜻대로 실천해도 늦지 않네
하나님과 관계가 올바를 때 너의 주변 이들과의 관계도 그러하리
하나님과 정상적 관계는 의심도 거역도 하지 않는 것
너의 이익보다 올바른 마음을 갖고 보좌 앞으로 오라
하나님의 감찰을 받고 순종하라 하나님 집의 이익을 우선하라
네가 이 뜻을 따른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정상이 되리

2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라 말씀의 반석 위에 모든 게 세워지네
하나님의 뜻대로 하라 거역하지 말라, 방해하지 말라
형제자매에게 유익하지 않은 것 말하지 말라 행하지 말라
수치스러운 일은 하지 말라 정직하라 하나님 앞에 가치 있는 일을 하라
하나님과 정상적 관계는 의심도 거역도 하지 않는 것
너의 이익보다 올바른 마음을 갖고 보좌 앞으로 오라
하나님의 감찰을 받고 순종하라 하나님 집의 이익을 우선하라
네가 이 뜻을 따른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정상이 되리
가끔 연약해지거나 어떤 손해를 받더라도
하나님 집의 이익을 우선하라 자신을 위해 탐내지 말고 의를 행하라
하나님과 정상적 관계는 의심도 거역도 하지 않는 것
너의 이익보다 올바른 마음을 갖고 보좌 앞으로 오라
하나님의 감찰을 받고 순종하라 하나님 집의 이익을 우선하라
네가 이 뜻을 따른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정상이 되리

― ≪어린양을 따르며 새 노래 부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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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 찬양 더보기:

                   ✔ 말씀 찬양 CCM <하나님과의 정상적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가사 버전)

                   ✔ 말씀 찬양 CCM <너는 믿음으로 많은 것 얻었네>(가사 버전)

                   ✔ 말씀 찬양 CCM <묵묵히 모두에게 공급하시는 하나님>(가사 버전)
     
                   ✔ 말씀 찬양 CCM <육을 버리는 실행>(가사 버전)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매일의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1>(발췌문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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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 후 하나님이 노아에게 내린 축복 사진제공: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전능신교]

홍수 후 하나님이 노아에게 내린 축복


(창세기 9:1~6)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찌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여 방주를 지은 뒤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하는 날들을 보냈고, 그의 여덟 식구는 살아남았다. 노아의 여덟 식구 이외의 인류는 모두 멸망되었고, 땅의 생물들도 모두 멸망되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축복을 내렸다. 하나님은 노아와 노아의 아들에게 어떤 말씀들을 하였다. 이 말씀들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베풀어 주려는 것이자 노아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이는 하나님이 그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의 명령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주는 축복이고 약속이었다. 또한 하나님이 사람에게 상을 주는 방식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보기에 노아가 완전한 자이든 의인이든 상관없었고,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알든 상관없었다. 결국, 노아와 그의 세 아들은 하나님 말씀을 따랐고,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했으며,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리하여 홍수로 세상이 멸망된 뒤에도 하나님을 위해 인류와 각종 생물이 보존될 수 있게 하였고, 하나님의 다음 단계 경륜을 위해 혁혁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바로 노아의 이 모든 행위 때문에 하나님이 축복을 내린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사람에게 있어 노아의 행위는 언급할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노아도 한 일은 없잖아. 하나님이 노아를 남기겠다고 결정하셨으니 그는 당연히 남을 수 있었겠지.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그의 공로 때문이 아니야. 하나님이 이렇게 이루려고 하셨던 거지. 사람은 피동적이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보기에 위대한 사람이든 보잘것없는 사람이든 상관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의 명령과 받은 사명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협력하여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순조롭게 완수될 수 있도록 한다면, 하나님 입장에서 이런 행위는 하나님이 기억할 만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만하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의 이런 행위를 아끼며,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이런 정과 마음을 귀하게 여긴다. 이것이 하나님의 태도다. 그러니 하나님이 왜 노아를 축복했겠느냐? 하나님은 사람의 이런 행위와 순종을 아끼고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노아를 축복한 것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 말씀에 따르고 하나님을 흡족게 해 드리면 하나님은 당연히 사람을 축복해 주셔야 합니다. 이건 당연한 일 아닌가요?” 이렇게 말해도 될까? 어떤 사람은 “안 됩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면 왜 안 되는 것이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이 말도 완전히 맞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이 준 사명을 받아들였을 때, 사람의 행위의 좋고 나쁨, 순종했는지,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해 드렸는지, 그리고 그의 행위들이 합격점을 받을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데 있어 하나님은 한 가지 기준이 있다.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사람의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이 어떻게 행하든 행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당연히 축복해 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오해이다. 하나님은 일의 결과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일의 발전 과정 속에서 사람의 마음과 태도가 어떠했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핀다. 사람의 마음에 순종함이 있는지, 헤아림이 있는지, 하나님을 흡족게 하려는 염원이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당시의 노아는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너희가 지금 알고 있는 이치보다 많이 알고 있었을까? 하나님에 관한 개념이나 앎, 이런 진리에 대해 너희보다 더 많은 양육과 목양을 받았을까? 그렇지 않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현대인의 의식과 사상 속, 심지어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하나님에 관한 개념과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는 명확하지 않고 애매모호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태도를 보인다. 반면 노아의 마음과 의식 속에는 하나님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생각이 있었고, 노아는 이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노아의 순종에는 불순물이 없어 검증을 견뎌 낼 수 있었다. 그의 마음은 순결했고 하나님께 활짝 열려 있었다. 그는 하나님이 준 사명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수많은 이치상의 인식으로 하나님 말씀에 따르라고 자신을 설득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많은 사실들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필요도 없었다. 이것이 바로 노아와 현대인들의 본질적인 차이다. 또한 하나님 보기에 완전한 사람에 대한 진정한 해석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노아와 같은 사람을 원하고 인정한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축복하는 대상이다. 여기에서 너희는 어떤 깨달음을 얻었느냐? 사람은 사람의 겉모습을 보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내면과 본질을 본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사람이 그를 조금이라도 등한시하고 의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그 어떤 추측이나 시험도 용납하지 않는다. 현대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주하고 있고,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한다고까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 내면 깊은 곳에 존재하는 것과 패괴된 본질,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태도가 사람이 하나님을 참되게 믿지 못하도록, 그리고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그러기에 사람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준 것과 같은 축복을 받기 매우 어려운 것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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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영상 보기: 
      매일의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1>(발췌문 27)
      홍수 후 하나님이 노아에게 내린 축복


🌸 더 보 기 :

   ✔ 매일의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1>(발췌문 24)

   ✔ 매일의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1>(발췌문 25)







5/21/2020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 관한 말씀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 관한 말씀 사진제공 :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전능신교]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희로애락을 알아야 한다. 즉, 하나님이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증오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에게 관용과 긍휼을 베푸는지, 어떤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하나님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든지, 얼마나 많은 긍휼과 자비를 베풀든지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 하나님의 존엄은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지만 총애하지는 않는다. 사람에게 사랑과 긍휼, 관용을 베풀지만 한 번도 지나치게 사랑한 적은 없다. 하나님께는 자신의 원칙과 범위가 있다. 너는 아무리 크고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어도 절대 하나님을 사람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사람을 가장 가까운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사람으로 여긴다면, 피조물과 같은 한 사람이나 친구, 혹은 숭상의 대상으로 여긴다면, 하나님은 너에게 얼굴을 감추고 너를 버릴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이니 그 누구도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해 하나님의 이런 말씀을 자주 볼 수 있다. “네가 얼마나 먼 길을 달렸든, 네가 얼마나 많은 사역을 했든, 네가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았든, 일단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면 하나님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사람을 가장 가까운 대상으로 여기지만, 사람은 하나님을 친척이나 친구로 여기거나 하나님을 단짝 대하듯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네가 하나님의 사랑과 관용을 얼마나 많이 느꼈든 너는 영원히 하나님을 너의 친구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7> 중에서

 하나님의 거스를 수 없는 성품과 하나님의 위엄은 하나님 자신만의 본질이고,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 자신만의 성품이다. 하나님이 노하는 원칙은 하나님 자신만의 신분과 지위를 뜻하며, 그가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의 본질을 상징한다는 것은 더 언급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의 성품은 하나님 자신의 고유의 본질이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지 않고 지리적 위치로 인해 바뀌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고유의 성품은 하나님의 고유의 본질이다. 그가 누구에게 사역하든 간에 그의 본질과 공의로운 성품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을 노하게 했을 때, 하나님이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 원래의 성품이다. 이때 하나님이 노하는 원칙은 변하지 않고, 그의 유일무이한 신분과 지위도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노하는 이유는 그의 본질에 변화가 생기거나 그의 성품에 다른 요소가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께 대항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렀기 때문이다. 사람이 공공연히 하나님께 도발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지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하나님이 봤을 때, 하나님에 대한 도전은 사람이 하나님과 겨루는 것이자 하나님의 노를 시험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대항할 때, 하나님과 겨룰 때, 계속해서 하나님의 노를 시험할 때가 바로 죄악이 범람할 때이며, 이때 하나님의 진노가 자연스럽게 발현하고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다는 것은 모든 사악한 세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모든 적대 세력이 멸망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공의로운 성품이고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진노이다. 하나님의 존엄과 거룩함이 도전을 받을 때, 정의의 힘이 저지당하고 사람이 정의를 찾아볼 수 없을 때는 바로 하나님이 진노를 나타낼 때이다. 하나님의 본질 때문에 땅에서 하나님과 겨루고 대적하고 맞서는 세력들은 모두 사악하고 패괴되고 정의롭지 않은 세력이며, 사탄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사탄에 속하는 세력이다. 하나님은 정의롭고 빛이며, 흠이 없이 거룩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사악하고 패괴되고 사탄에게 속한 모든 것은 하나님이 진노를 나타내게 되면 모두 소멸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하나님은 불로 소돔 성을 멸망시켰다. 이 방식은 하나님이 인류나 물체를 멸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불을 이용해 인류를 멸한 것은 그 육체뿐 아니라 영, 혼, 육 전부를 멸하여 소돔 성 사람들이 물질세계와 사람이 볼 수 없는 세계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하나님이 진노를 발현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이런 발현은 하나님의 진노 본질의 일면이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노할 때 더 이상 그 어떤 긍휼과 자비, 관용을 베풀지 않고 인내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도, 어떤 일도, 어떤 이유도 하나님이 계속 인내하도록 설득할 수 없고, 다시 긍휼과 관용을 베풀도록 설득할 수 없다. 그 대신 하나님은 한시도 지체 없이 그의 진노와 위엄을 나타내고, 그가 하려는 일을 하고 또한 깔끔하고 마음에 들도록 한다. 이것이 바로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을 나타내는 방식이자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일부를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걱정하고 사랑할 때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을 볼 수 없고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을 느낄 수 없는데, 이것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는 오직 긍휼, 관용, 사랑만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한 성을 멸하고 인류를 증오하는 것을 보게 될 때, 인류를 멸하는 그의 노와 위엄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은 사람의 거스름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의 거스름을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은 어떤 피조물도 상상할 수 없고, 피조물이 아닌 어떤 것도 간섭하거나 영향을 줄 수 없으며, 사칭이나 모방은 더욱 불가하다. 그러므로 이 부분의 하나님 성품을 인류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이러한 성품을 갖추고 있으며 하나님만이 이런 성품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이 이와 같은 공의로운 성품을 갖춘 것은 하나님이 사악함, 암흑, 패역, 인류를 패괴시키고 집어삼키는 사탄의 온갖 악행을 증오하는 데에서 기인하며, 하나님께 대항하는 모든 죄악된 행위를 증오하는 데에서 기인하고 또 하나님의 거룩하고 무결한 본질에서 기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피조물이든 비피조물이든 하나님께 공개적으로 대항하고 하나님과 겨루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설령 하나님이 긍휼히 여겼던 자일지라도, 설령 하나님이 택한 자일지라도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고 하나님의 인내와 관용의 원칙을 거슬렀다면 하나님은 가차 없이, 주저하지 않고 거스를 수 없는 공의로운 성품을 보여 줄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하나님이 진노를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한 측면의 표현이지만 하나님은 절대 원칙 없이, 대상의 구분 없이 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절대 쉽게 노하지 않고, 진노와 위엄을 쉽게 나타내지 않는다. 하나님의 진노에는 상당한 정도와 기준이 있다. 이는 사람이 화를 내고 울분을 쏟아 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성경에는 사람과 하나님의 대화 내용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어떤 이는 하는 말이 깊이가 없고 우매하여 어린아이 같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치지 않았고 정죄하지도 않았다. 특히, 욥이 시련을 겪는 동안 욥의 세 친구와 사람들이 욥에게 한 말을 듣고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떻게 했느냐? 그들을 정죄했느냐? 그들에게 노했느냐?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욥에게 그들을 위해 간구하고 기도하라 하였고, 그들의 과실을 기억하지 않았다. 이는 패괴되고 무지한 인류를 대하는 하나님의 주요 태도를 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진노를 나타내는 것은 절대 감정을 표현하거나 감정을 쏟아 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화를 총체적으로 폭발시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진노를 나타내는 것은 스스로 감정을 통제하기 힘들어서도, 울분이 극에 달해 쏟아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도 아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발현이자 참된 표현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본질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하나님이 진노하는 분이어서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유와 원칙 없이 노한다는 것이 아니다. 아무 이유도 원칙도 없이 함부로 화를 내는 것은 오히려 패괴된 인류의 전유물이다. 사람은 어떤 위치에 오르면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걸핏하면 트집 잡아 분풀이하고 불만을 털어놓으며, 이유 없이 화를 냄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자신의 신분과 지위가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려 한다. 어떤 자리에 오르지 못한 패괴된 인류도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데, 그들이 화를 내는 이유는 항상 자신의 이익이 침해당하기 때문이다. 패괴된 인류는 항상 자신의 지위와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감정을 쏟아 내고 교만한 본성을 드러낸다. 사람이 화를 내고 울분을 표하는 것은 모두 죄악의 존재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이는 사람이 불만을 표현하는 방식이며, 여기에는 불순함, 음모와 계략, 패괴와 사악함, 심지어 야심과 욕망이 가득하다. 정의와 사악의 싸움에서 사람은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화내지는 않는다. 바꾸어 말하자면 정의의 힘이 위협당하고 박해당하고 공격당할 때, 사람은 이를 무시하고 회피하거나 뒤로 물러선다. 하지만 사악한 세력 앞에서는 비위를 맞추고 비굴하게 굽실거린다. 그러므로 사람이 분풀이하는 것은 사악한 세력의 출구이며, 이는 육에 속한 사람의 악행이 넘쳐 나고 억제하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 준다. 반면,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날 때 모든 사악한 세력과 사람을 해하는 죄악은 저지당할 것이고, 하나님의 사역을 가로막는 모든 적대 세력은 드러나고 분리되고 저주받을 것이며, 하나님을 적대시한 사탄의 모든 공범자들은 징벌받고 완전히 제거될 것이다. 그에 반해 하나님의 사역은 막힘없게 되고, 하나님의 경륜은 정해진 대로 한 단계씩 앞으로 진행된다. 또한 하나님의 선민은 사탄의 교란도 미혹도 받지 않게 되고,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은 모두 안정되고 평온한 환경에서 하나님의 인도와 공급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의 진노는 모든 사악한 세력이 더 이상 자생하고 판치지 못하도록 보장하며, 모든 정의와 긍정적인 사물이 존재하고 퍼져 나갈 수 있도록,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무너지지 않도록 보장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사람이 타인의 앞이나 뒤에서 화를 낼 때는 다 서로 다른 속셈과 목적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혹은 자신의 이익이나 이미지, 체면 등을 지키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어떤 이는 화를 내는 데에 기준이 있지만 어떤 이는 기준도 없다. 화를 내고 싶으면 마음대로 내며 아무 제약도 받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사람의 화는 사람의 패괴 성품에서 온 것이다.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다 혈기와 천성적인 것에 속하며, 정의로움과 정의롭지 않음을 논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사람의 본성과 본질에는 진리와 부합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패괴된 인류의 화는 하나님의 진노와 함께 논할 수 없다. 사탄에 의해 패괴된 사람의 행동은 하나같이 다 패괴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고 패괴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화를 내는 것이 이론적으로 얼마나 정당하든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함께 논할 수 없다. 하나님이 노할 때, 사악한 세력은 저지당하고 사악한 사물은 멸망되지만 정의롭고 긍정적인 사물은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를 받아 계속 이어질 수 있다. 하나님이 진노하는 이유는 정의롭지 않고 부정적이고 사악한 사물이 정의롭고 긍정적인 사물의 정상적인 발전을 가로막거나 교란시키거나 파괴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진노를 나타내는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지위와 신분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정의롭고 긍정적이며 아름답고 선한 사물의 존재를 수호하고 인류의 정상적인 생존 규칙과 법칙을 수호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진노를 발하는 근본 원인이다. 하나님의 노는 하나님의 성품이 매우 정당하고 자연스럽게, 또 진실하게 나타난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 이면에 다른 속셈이나 교활함이나 음모가 없고 패괴된 인류에게 공존하는 욕망, 간사함, 악랄함, 폭력성, 사악함 등은 더더욱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진노를 발하기 전에 이미 모든 일의 본질을 분명하고 뚜렷하게 보았고, 이에 대한 정확하고 분명한 정의와 결론을 내렸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일에 대한 목표와 태도가 아주 명확하다. 두루뭉술하거나 맹목적이지 않고, 충동적이거나 마음 내키는 대로 하지 않으며, 원칙이 없는 것은 더욱 아니다. 이 또한 하나님 진노의 실제적인 면이다. 인류는 바로 하나님 진노의 이 실제적인 면으로 인해 정상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잃게 되면 인류는 비정상적인 삶으로 추락하게 되고, 정의롭고 아름다우며 선한 모든 사물은 멸해져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또 하나님의 진노를 잃게 되면 피조물의 생존 법칙과 규칙이 파괴되고 심지어 완전히 뒤집어질 것이다. 인류가 만들어진 후, 하나님은 그의 공의로운 성품으로 계속해서 인류의 정상적인 생존을 지키고 유지하였다. 그의 공의로운 성품에는 진노와 위엄이 있기 때문에 모든 사악한 사람과 사물, 인류의 정상적인 생존을 방해하고 파괴하는 모든 것은 징벌받고 통제되고 멸망된다. 수천 년 동안 하나님은 인류를 경영하는 사역에서 그에게 대항하는 자, 사탄의 공범자 그리고 사탄의 종이 된 더러운 귀신과 악령을 그의 공의로운 성품으로 끊임없이 치고 멸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인류를 구원하는 사역을 계속해서 앞으로 이끌 수 있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진노가 있었기 때문에 인류 가운데 가장 정의로운 일이 지금까지도 파괴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컸든 간에, 니느웨 사람들이 금식을 선포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은 그 순간 하나님의 마음은 점차 누그러져 뜻을 되돌리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성을 멸할 것이라 선포하기 바로 직전, 즉 그들이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기 직전에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노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회개하는 모습을 보면서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점차 관용과 긍휼로 바뀌었다. 하나님의 두 성품이 하나의 일에서 동시에 나타났는데, 이는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여기서 모순되지 않음을 사람은 어떻게 이해하고 인식해야 하느냐? 완전히 다른 두 본질은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기 전과 후에 하나님에게서 나타난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하나님의 참되고 거스름을 용납하지 않는 본질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태도를 통해 하나님이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고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하는 것이 어렵고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사람에게 노할 때 하나님은 사람이 진실로 회개할 수 있기를 바라고, 사람의 참된 회개를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낌없는 긍휼과 관용을 베풀 것이다. 사람의 악행은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지만,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서 참된 회개를 하는 자와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는 자는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들을 대한 일에서 하나님의 태도는 아주 명확하다. 즉,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는 것은 어렵지 않고, 하나님은 사람의 참된 회개를 원한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이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면 하나님은 마음을 되돌리고 사람에 대한 태도를 바꾼다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니느웨 성 사람들도 소돔 성 사람들처럼 패괴되고 사악하고 아주 폭력적이었지만 그들이 회개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마음을 되돌렸고 그들을 멸하지 않았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지시를 대하는 태도는 소돔 성 사람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순종하고 회개하였고, 그리고 여러 면에서 진실하고 간절한 태도를 보여 주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끼는 마음이 우러나 상을 주었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상을 주고 아끼는 마음을 갖는 것은 그 누구도 할 수 없고,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 그리고 인류에 대한 진심은 그 누구도 갖추지 못한 것이다. 네가 생각하는 위인이나 슈퍼맨 중에 높은 위치, 즉 위인의 입장이나 지고한 위치에 서서 인류나 피조물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자가 있겠느냐? 인류 중에 누가 인류의 생존 현황을 손금 보듯 환히 알 수 있겠느냐? 누가 인류의 생존에 부담과 책임감을 가질 수 있겠느냐? 누가 성을 멸한다고 말할 자격이 있겠느냐? 또 누가 성의 죄를 사할 자격이 있겠느냐? 누가 자신이 창조한 만물을 아낀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느냐? 오직 창조주밖에 없다! 창조주만이 이 인류를 아끼고, 이 인류를 사랑하며, 창조주에게만이 이 인류를 내버리지 못하는 참된 마음이 있다. 또 창조주만이 이 인류를 긍휼히 여기고 모든 피조물을 아낀다. 그의 마음은 인류의 일거수일투족에 이끌린다. 그는 인류의 사악하고 패괴된 모습에 분노하고 근심하고 슬퍼하며, 인류가 회개하고 신복하는 모습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마음을 되돌리고 축하한다. 그의 모든 마음과 생각은 인류를 위해 생기고 움직이며, 그의 소유와 어떠함은 인류를 위해 발현된다. 또한 그의 희로애락은 인류의 생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인류를 위해 바삐 움직이고, 인류를 위해 조용하게 자신의 생명을 모두 바치며, 인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의 일분일초를 기여한다…. 그는 자신의 생명은 아낄 줄 몰랐지만 자신이 손수 창조한 인류는 늘 아껴 왔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인류에게 주었다…. 그가 조건도 보상도 없이 긍휼과 관용을 베푸는 것은 오로지 인류가 그의 눈 아래에서, 그의 생명의 공급 아래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또 언젠가 인류가 다시 그의 앞에 돌아와 그가 바로 인류에게 생존을 위한 자양분을 공급하고 만물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그분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요나가 명을 받들고 니느웨 성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긴 했지만,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고 또 성안 사람들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염려와 기대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님은 요나를 질책함으로써 그에게 알려 주려는 것이 있었다. 즉, 인류는 하나님이 손수 만든 것이며,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심혈을 기울였고, 모든 사람에게 기대를 걸고 있으며, 또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 공급을 누리고 있고, 하나님이 자신이 기울인 심혈로 그 모든 사람을 바꾸어 왔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요나에게 그가 박 넝쿨을 아끼는 것처럼 하나님도 손수 만든 인류를 마지막 순간까지 절대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더군다나 그 성안에는 수많은 아이와 무고한 가축이 있었으니 말이다. 하나님은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철없는 나이대인 창조된 인류의 생명을 그렇게 쉽게 끝내거나, 그들의 결말을 그렇게 쉽게 정할 리가 없다. 하나님은 그들이 성장하여 다시는 조상들이 갔던 길을 답습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를 받지 않으며, 니느웨 성의 과거를 증언할 수 있기를 바랐다. 또한 하나님은 회개한 후의 니느웨와 니느웨의 미래를 보고, 다시 하나님의 긍휼 아래에서 사는 니느웨를 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니느웨 성에서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창조된 인류가 곧 니느웨의 미래라고 생각했고, 그들이 언급하기 싫은 니느웨 성의 과거를 짊어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 아래에 있는 니느웨 성의 과거와 미래를 증언하는 중차대한 일을 책임질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그 참된 고백에서 인류를 긍휼히 여기는 창조주의 마음을 완전히 볼 수 있다. 이는 인류에게 ‘창조주의 긍휼’이 알맹이 없는 단어나 헛된 약속이 아니라 여기에는 구체적인 원칙과 방식, 목표가 있다는 것과 그는 거짓이나 가식이 없고 진실하고 참되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그는 모든 시기와 시대에 끊임없이 인류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었다. 하지만 요나와의 대화는 창조주가 왜 인류를 긍휼히 여기는지, 어떻게 긍휼히 여기는지, 인류에게 얼마나 많은 관용과 진심을 베풀었는지에 대해 지금까지 창조주가 언어로 표현한 유일한 내용인 것이다. 이 짧은 대화는 여호와 하나님이 인류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표현한 것이고, 인류를 향한 자신의 태도를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이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긍휼을 많이 베풀었다는 구체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인류의 선조에게 긍휼을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예전과 같이 오늘날의 후손에게도 한 세대 또 한 세대 긍휼을 베풀고 있다. 비록 하나님의 진노가 종종 인류의 어떤 구석, 어떤 시대에 임했더라도 하나님은 긍휼을 멈춘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긍휼로 창조된 인류를 한 세대 또 한 세대 이끌고 인도하며 그들에게 자양분을 공급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인류에 대한 그의 참된 마음이 영원히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여호와 하나님이 한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라는 말씀처럼 그는 계속해서 자신이 손수 만든 만물을 아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의 공의로운 성품에 있는 긍휼이다. 이것 또한 틀림없는 창조주의 유일무이함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은 확실히 존재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노할 때에도 사람에게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의 면을 보여 준다. 사람이 완전히 하나님의 명령과 요구에 따라 행할 때, 하나님은 크게 긍휼을 베푼다. 사람이 심히 패괴되고 하나님을 매우 적대시하고 대적할 때 하나님은 크게 노한다. 그리고 그 노는 어느 정도로 분출될까? 그 사람의 대적과 악행이 더 이상 하나님께 보이지 않고, 더 이상 하나님 눈앞에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노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노가 사라지게 된다. 즉, 누구를 막론하고 그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배반하여 만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 때, 그의 몸과 생각이 외적으로, 또 주관적으로 얼마나 하나님을 경배하고 따르고 순종하고 싶든지 간에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하나님의 노는 끝없이 분출될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이 사람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었을 때, 하나님이 크게 노할 때, 하나님의 노는 걷잡을 수 없이 계속 분출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에게는 영원히 더 이상의 긍휼도 관용도 베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 성품의 일면이다. … 그는 선하고 아름답고 좋은 것에 대해서는 관용과 긍휼을 베풀며, 악한 것과 죄에 속한 것, 사악한 것에 대해서는 크게 노하며, 그 노가 끊이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 성품의 가장 주된 부분이자 가장 두드러지고, 더욱이 하나님이 시종 나타내고 있는 주요 2가지 측면이다. 즉, 크게 긍휼을 베풀고 크게 노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하나님은 니느웨 성 사람들에 대한 마음이 바뀌는 과정에서 일말의 망설임도, 모호함도 없었고, 순수한 진노에서 순수한 관용에 이르렀다. 여기서 하나님의 본질이 참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은 사역에 있어 단 한 번도 우유부단한 적이 없다. 그의 사역 원칙과 목적은 흠 없이 순결하고 투명하며, 여기에는 절대 그 어떤 계략과 음모도 섞여 있지 않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본질에는 어둠과 사악함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니느웨 성 사람들에게 노한 것은 그들의 악행이 하나님 안중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때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이 진노를 거두고 그들에게 다시 관용을 베풀었을 때도 하나님이 나타낸 것은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었다. 이 모든 변화는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로 인해 바뀐 것이다. 그 기간에 하나님의 거스를 수 없는 성품은 변하지 않았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고 사람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의 본질도 바뀌지 않았다. 사람이 악을 행하여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진노하지만, 사람이 참된 회개를 하면 하나님은 마음을 되돌려 진노를 거둔다. 그러나 사람이 완고하게 하나님께 계속 대항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멸할 때까지 노를 멈추지 않는데, 하나님의 진노는 그렇게 조금씩 사람에게 가까워진다. 이 또한 하나님 성품의 본질이다. 하나님이 나타내는 성품이 진노든, 긍휼과 자비이든 모두 사람의 태도와 행동, 그리고 진심에서 우러난 하나님에 대한 태도에 기인한다. 만약 하나님이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노한다면, 그 사람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적대시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 사람이 참된 회개를 하거나 하나님께 ‘머리를 숙인’ 적이 없고 진심으로 신복한 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만약 누군가 항상 하나님의 보살핌 안에 있고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는다면, 그 사람은 분명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진실로 신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적대시한 적이 없을 것이다. 늘 하나님 앞에서 참된 회개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가 늘 임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노는 임하지 않을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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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 보 기: 

                  
                         ✔ 말씀 찬양 CCM <하나님 성품의 상징>(가사 버전)

                                           ✔ 말씀 찬양 CCM <위대하고 고상한 하나님의 성품>



5/06/2020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말씀 찬양 CCM <말씀을 생명의 실제로 삼는 것이 하나님 믿는 관건>


1
하나님을 믿으며 이적을 보려 하지 말아야 하네 육적인 것도 위하지 말아야 하네
하나님 알길 추구하고 베드로처럼 죽기까지 순종하길 추구해야 하네
이것을 이루어야 하네
하나님 믿는 관건은 말씀을 생명의 실제로 삼는 것이네
하나님 말씀 모두 실행하고 확실히 실현할 수 있다면 하나님 목적에 이른 것이네

2
하나님 말씀 먹고 마시는 것은 하나님을 알기 위함이네 그를 흡족게 하기 위함이네
말씀을 먹고 마심으로 하나님을 더욱 잘 알게 되네
그래야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를 사랑할 수 있네 이것이 믿는 목적이어야 하네
하나님 믿는 관건은 말씀을 생명의 실제로 삼는 것이네
하나님 말씀 모두 실행하고 확실히 실현할 수 있다면 하나님 목적에 이른 것이네

3
하나님 믿으며 그에게 온전케 되길 순종하길 추구해야 하네
불평 없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마음 헤아리며
베드로의 분량과 품격 갖추게 된다면 믿음은 최고조에 이르고 하나님께 얻어지리
늘 이적과 기사 보기만을 원한다면 믿음의 관점이 틀린 것이네
하나님 믿는 관건은 말씀을 생명의 실제로 삼는 것이네
하나님 말씀 모두 실행하고 확실히 실현할 수 있다면 하나님 목적에 이른 것이네

― ≪어린양을 따르며 새 노래 부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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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 천  :




     

5/05/2020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말씀 찬양 CCM <말씀을 생명의 실제로 삼는 것이 하나님 믿는 관건>



1
하나님을 믿으며 이적을 보려 하지 말아야 하네 육적인 것도 위하지 말아야 하네
하나님 알길 추구하고 베드로처럼 죽기까지 순종하길 추구해야 하네
이것을 이루어야 하네
하나님 믿는 관건은 말씀을 생명의 실제로 삼는 것이네
하나님 말씀 모두 실행하고 확실히 실현할 수 있다면 하나님 목적에 이른 것이네

2
하나님 말씀 먹고 마시는 것은 하나님을 알기 위함이네 그를 흡족게 하기 위함이네
말씀을 먹고 마심으로 하나님을 더욱 잘 알게 되네
그래야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를 사랑할 수 있네 이것이 믿는 목적이어야 하네
하나님 믿는 관건은 말씀을 생명의 실제로 삼는 것이네
하나님 말씀 모두 실행하고 확실히 실현할 수 있다면 하나님 목적에 이른 것이네

3
하나님 믿으며 그에게 온전케 되길 순종하길 추구해야 하네
불평 없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마음 헤아리며
베드로의 분량과 품격 갖추게 된다면 믿음은 최고조에 이르고 하나님께 얻어지리
늘 이적과 기사 보기만을 원한다면 믿음의 관점이 틀린 것이네
하나님 믿는 관건은 말씀을 생명의 실제로 삼는 것이네
하나님 말씀 모두 실행하고 확실히 실현할 수 있다면 하나님 목적에 이른 것이네

― ≪어린양을 따르며 새 노래 부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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