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menu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플랫폼배경사진 출처: https://www.holyspiritspeaks.org/special-topic/kingdom-has-descended-on-the-world/copyright_en.html
레이블이 하나님의축복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하나님의축복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7/03/2020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매일의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발췌문 48)



욥은 사탄을 이겨 하나님 눈에 진정한 사람이 되었다

욥은 처음의 시련에서 모든 재산과 자녀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로 인해 무너지지 않았고, 하나님께 죄를 짓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사탄의 시험을 이겨 냈고, 재산과 자녀 그리고 몸을 제외한 모든 것을 잃는 시련을 이겨 냈다. 다시 말해, 욥은 하나님이 그의 소유를 거두어 간 것에도 순종할 수 있었으며, 그로 인해 감사와 찬양까지 드릴 수 있었다. 이것이 욥이 사탄의 첫 번째 시험에서 보여 준 것이며, 또한 욥이 하나님의 첫 번째 시련에서 증거한 것이다. 두 번째의 시련에서 사탄은 손을 뻗어 욥에게 갖은 해를 가했다. 욥은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고통을 겪었을지라도 그의 증거는 오히려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그는 그의 강인함과 믿음,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경외심으로 또 한 번 사탄을 물리쳤다. 그리고 그가 보여 준 것과 증거한 것 역시 또 한 번 하나님께 인정받고 열납되었다. 이번 시험에서 욥은 자신의 실제 행동을 통해 사탄에게 선포했다. 육체의 고통으로도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과 순종을 변하게 할 수 없으며,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과 경외심을 빼앗아 갈 수 없다고 선포한 것이다. 또한 죽음에 이르렀어도 하나님을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며, 자신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버리는 일 또한 없을 것이라고 선포한 것이다. 욥의 의연함을 본 사탄은 겁이 났다. 욥의 믿음으로 사탄은 두렵고 간담이 서늘해졌으며, 사탄과 사생결단하겠다는 욥의 기세를 보고 침통해졌다.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에 사탄은 속수무책이 되었다. 그래서 사탄은 욥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욥을 참소하는 짓을 그만두었다. 이것은 욥이 세상을 이기고, 육체를 이기고, 사탄을 이기고, 사망을 이겨 하나님께 속한 완전한 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욥은 그 두 차례의 시련 속에서 굳게 섰으며,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실제로 살아 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그의 생존 법칙의 범위 역시 확장될 수 있었다. 그 두 번의 시련을 겪은 후, 욥은 인생에 더욱 풍부한 경험이 생겼다. 이 ‘경험’으로 인해 그는 더 성숙해지고 원숙해졌으며, 더 강인해지고 더 믿음 좋은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또한, 자신이 지키고 있는 순전함의 정확성과 가치를 확신하게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준 시련으로 욥은 사람을 염려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느끼게 되었으며, 하나님 사랑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로부터 욥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 하나님에 대한 헤아림과 사랑이 더 추가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준 시련에 욥은 천 리 밖으로 밀려 나가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더 가까워졌다. 욥은 육체의 고통이 극한에 달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보살핌을 느끼게 되면서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게 되었다. 그런 모습은 욥이 일찍이 계획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헤아림과 사랑으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자연스러운 발현이었다. 욥의 그 ‘자연스러운 발현’은 하나님에 대한 헤아림과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해, 욥은 자신을 미워했고, 하나님이 고통받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헤아림과 사랑으로 자기 자신을 잊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때의 욥은 오랜 세월 하나님을 우러러보고 사모하고 그리워하던 데서 헤아리고 사랑하는 경지로 자신을 승화시켰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 순종과 경외심을 헤아림과 사랑으로 승화시켰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께 조금이라도 상처 주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그 어떤 행동도 용납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으로 인해 하나님이 슬퍼하거나 상심하는 것은 물론, 괴로워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눈에 욥은 여전히 변함없는 욥이었지만, 그의 믿음과 순종,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하나님은 완전한 만족과 기쁨을 얻게 되었다. 그때의 욥은 하나님이 기대했던 완전함에 이르렀으며, 하나님 눈에 명실공히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었다. 욥은 자신의 의로운 행동으로 사탄을 이겼고, 하나님 앞에서 굳게 섰으며, 온전하게 되었고, 자신의 생명 가치를 승화시켰으며, 초월하게 되었다. 또한, 더 이상 사탄에게 공격받지 않고 시험당하지 않는 사람의 첫 사례가 되었다. 욥은 의로움으로 인해 사탄에게 참소당하고 시험당했으며, 의로움으로 인해 사탄의 손에 넘겨졌고, 또한 의로움으로 말미암아 사탄을 이기고 사탄을 물리쳤으며 굳게 섰다. 그로부터 욥은 더 이상 사탄에게 넘겨지지 않는 첫 번째 사람이 되었으며, 진정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빛 속에서 살고, 사탄의 감시와 해가 없는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살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눈에 진정한 사람이 되었고, 자유로워졌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 🌷 📖 🌹 📖


하나님 말씀 더보기:


매일의 하나님 말씀 <네가 예수의 영체를 볼 때는 하나님이 이미 하늘과 땅을 새롭게 바꾼 후이다>(발췌문 286)
매일의 하나님 말씀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발췌문 98)

매일의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발췌문 35)






6/29/2020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매일의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발췌문 60)


👉 욥은 다시 하나님의 복을 받았고 더 이상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았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욥은 어떤 말을 했느냐? 바로 우리가 앞에서 언급했던 말이다. 또한 욥기에 기록된 그 많은 분량의 말들이다. 그 많은 지면을 차지하는 말들을 보면, 욥은 하나님에 대해 어떤 원망도 의심도 없었으며, 오직 결과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기다림은 바로 그의 순종하는 태도였다. 그의 태도로 말미암아, 그가 하나님께 한 말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그를 열납하였다. 그가 시련을 겪을 때, 고통을 받을 때, 하나님은 그의 곁에 있었다. 하나님이 곁에 있다고 해서 그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줄어든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보고자 한 것을 보았고, 듣고자 한 것을 들었다. 욥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 앞에 이르렀고, 그의 모든 말은 하나님 귀에 상달되었다. 하나님은 다 들었고 보았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때, 그 시기 하나님에 대한 욥의 앎과 마음속의 생각은 사실 지금 사람들처럼 그렇게 구체적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당시의 배경에 따라 그가 말한 것을 인정해 주었다. 그것은 욥의 마음속 생각과 모든 행실, 그리고 그가 보여 준 것과 드러낸 것들이 이미 하나님의 요구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욥이 시련을 겪는 동안, 그의 마음속 생각과 다짐을 통해 하나님은 결과를 보게 된 것이다. 그 결과는 하나님이 보기에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뒤이어 하나님은 시련을 거두어 갔다. 그 후 욥은 고통 속에서 벗어났으며, 욥의 시련은 그때부터 사라져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욥은 이미 시련을 겪었고 또한 시련 속에서도 굳게 서고 사탄을 완전히 이겼기 때문에, 하나님은 정당한 복을 그에게 내린 것이다. 욥기 42장 10절과 12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욥은 또 한 번 하나님의 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더 많이 받았다. 이때, 사탄은 물러가 더 이상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욥은 더 이상 사탄의 방해와 공격을 받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욥에게 복을 준 것 역시 더 이상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았다.

👉 욥은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여생을 보냈다

비록 그때의 복은 소와 양, 낙타, 재산 등에 국한되었을지라도, 하나님이 욥에게 주고자 했던 복은 그런 것만이 아니었다. 그 당시, 하나님이 욥에게 어떤 영원한 약속을 주려 한다는 기록이 있느냐? 욥에 대한 하나님의 복에 결말에 대한 언급은 없었고, 또 그 복은 결말과 연관되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마음에서 욥의 비중과 지위가 얼마나 되든지 간에,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에는 매우 적당한 선이 있었다. 그는 결말에 대해 선포하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나님의 계획이 사람의 결말을 선포할 단계까지 진행되지 않았을 때, 즉 사역을 끝내는 단계가 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물질적인 축복만 좀 주었을 뿐 사람의 결말을 언급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욥은 여생을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보냈다. 이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된 점이다. 같은 점은 그도 정상인처럼 늙어 가고 어느 날 세상과 이별하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욥 42:17). 여기서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는 무슨 의미이냐? 하나님은 결말을 선포하지 않은 그 시대에 욥에게도 수명을 정해 주었으며, 그 수명이 다 찬 후 욥은 자연스럽게 세상과 이별했다. 그가 두 번째로 복을 받은 후부터 죽을 때까지, 하나님은 그에게 그 어떤 고통도 주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이 보기에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필연적인 것이었으며, 아주 정상적인 일이었다. 무슨 선고도 아니었고, 정죄도 아니었다. 욥은 살아생전에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다. 그가 죽고 난 후에 어떤 결말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았고, 그 어떤 평가도 없었다. 하나님은 말씀하고 일할 때 매우 적당한 선이 있다. 그가 하는 말씀과 일의 내용과 원칙은 그의 사역 단계와 사역 시기를 근거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속에 욥의 결말은 어떤 것이었을까? 하나님 마음속에 정해져 있지 않았을까? 확실히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싶지도 않았고 알려 줄 생각도 없었다. 그러므로 표면적으로는 욥이 기한이 차서 죽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욥의 일생이다.

👉 욥이 살아 낸 삶의 가치

욥의 일생은 가치가 있는 삶이 아니냐? 그의 가치는 어디에 있느냐? 왜 그의 삶이 가치가 있다고 말하느냐? 사람 쪽에서 볼 때, 그의 가치는 무엇이냐?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그는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인류를 대표해 사탄 앞에서, 세상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힘 있게 증거했다. 또한 그는 피조물이 해야 할 본분을 다 이행했고,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고 본보기가 되어 인류에게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면 사탄을 완전히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가치는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이 볼 때, 욥의 삶의 가치는 그가 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의 행사를 증거하고 찬양하여 하나님께 위안을 안겨 드리고 기쁨을 얻게 한 것에 있다. 하나님이 보기에, 그의 삶의 가치는 또한 욥이 살아생전에 겪은 그 시련에서 사탄을 이겼고, 사탄 앞에서, 세상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힘 있게 증거한 데에 있다. 그리고 인류 중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얻게 하였고, 하나님께 위안을 안겨 드렸으며, 절박한 마음을 가진 하나님께 결과를 보게 하고 희망을 보게 한 데에 있다. 그의 증거는 하나님의 인류 경영 사역에서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서고 사탄을 부끄럽게 한 선례를 남긴 것이다. 이러한 것이 욥의 삶의 가치가 아니냐? 그는 하나님께 마음의 위안을 얻게 하고 영광받은 기쁨을 미리 맛보게 했으며, 하나님의 경륜이 거기서 완벽한 시작을 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욥의 이름은 이로부터 하나님이 영광을 얻은 상징이 되었으며, 인류가 사탄을 이긴 표징이 되었다. 욥이 일생 동안 살아 낸 것과 그가 사탄을 이긴 위업은 하나님께 영원히 소중한 것으로 남을 것이다.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후세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본보기가 될 것이다. 그는 완전무결하고 빛나는 보석처럼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람들에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

💦 하나님 말씀 더보기:

      ➤ 매일의 하나님 말씀 <복음을 확장하는 사역도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이다>(발췌문 217)

      ➤ 매일의 하나님 말씀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1>(발췌문 89)

      ➤ 매일의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발췌문 61)







6/16/2020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말씀 찬양 CCM <무너져 가는 세상, 형성되고 있는 하나님나라> (가사 버전)


1
내 말이 유해지길 기다린다면, 포기하라!
내가 누굴 상대하는지에 달렸다
사랑하는 자에게는 위안을 주지만
너희에게는 엄하며 심판, 형벌, 진노만 내린다
나날이 세상은 무너지고, 사람은 멸망하고 있다
나날이 내 나라 형성되고, 내 장자들은 성장해 간다
나날이 내 진노 쌓이고, 형벌은 무거워진다
나날이 나의 말은 엄해진다

2
세상 각 나라의 형세가 갈수록 긴박하다
나날이 무너지고 혼란에 빠져든다
각 나라의 수뇌들은 최후의 권세 노릴 뿐
내 형벌이 임했음을 생각조차 못 한다
내 권력을 넘보다니, 이 어찌 망상 아니냐!
나날이 세상은 무너지고, 사람은 멸망하고 있다
나날이 내 나라 형성되고, 내 장자들은 성장해 간다
나날이 내 진노 쌓이고, 형벌은 무거워진다
나날이 나의 말은 엄해진다

3
나만이 만유의 주권자, 모든 것이 내게 달렸다
내 사역 여기까지 왔으니 날 연구하면 즉시 치리라
날마다 새로운 계시와 새로운 빛이 있고
모든 것이 점점 온전해지나
사탄의 마지막 날은 다가오고 있다
점점 더 가까이, 더 분명하게
나날이 세상은 무너지고, 사람은 멸망하고 있다
나날이 내 나라 형성되고, 내 장자들은 성장해 간다
나날이 내 진노 쌓이고, 형벌은 무거워진다
나날이 나의 은 엄해진다

― ≪어린양을 따르며 새 노래 부르네≫


🌺🌻🌼🌸🌷


🎀 말씀 찬양 더보기:

                 ✔ 말씀 찬양 CCM <온 우주에 공개한 하나님의 행정> (가사 버전)

                 ✔ 말씀 찬양 CCM <인류의 구원 위해 두 번 성육신하신 하나님> (가사 버전)

                 ✔ 말씀 찬양 CCM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모이는 축복 누리도다> (가사 버전)









6/03/2020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매일의 하나님 말씀 <3단계 사역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길이다>(발췌문 7)


3단계 사역은 하나님이 행한 모든 사역과 인류 구원의 실제 기록이지, 지어낸 것이 아니다. 너희가 정말로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이 행한 3단계 사역을 알아야 하며, 한 단계도 빠트려서는 안 된다. 이는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인식이다.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앎은 사람이 스스로 지어내거나 생각해 내는 것이 아니며, 성령이 특정한 한 사람에게 특별한 은총을 베푼 결과는 더더욱 아니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면서 얻은 앎이자 하나님이 사역한 사실을 체험한 후에야 생기는, 하나님에 대한 앎이다. 이런 앎은 아무렇게나 얻을 수 있는 것도, 누군가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완전히 개인의 체험과 관계되는 일이다. 이 3단계 사역의 핵심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이다. 하지만 이 구원 사역에는 또 여러 가지 사역 방식과 하나님의 성품이 발현되는 방식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은 사람이 발견하기 가장 어렵고, 받아들이기도 힘든 것이다. 시대가 나뉘고, 사역이 달라지고, 사역의 장소와 대상이 바뀌는 등등은 모두 3단계 사역에 포함된다. 특히 성령 역사의 방식 차이, 하나님의 성품과 형상, 이름, 신분 또는 다른 변화들은 모두 3단계 사역 안에 있다. 한 단계의 사역은 그저 한 부분만 대변하고 한 범주에만 국한되기에 시대의 구분은 물론, 사역의 전환이라고도 할 수 없으며, 그 밖의 다른 부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3단계 사역은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전체 사역이다. 사람은 구원 사역에서 하나님의 사역과 성품을 알아야 한다. 이 사실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알아 간다는 것은 근거 없는 헛소리이자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그런 앎은 사람을 설득할 수도, 정복할 수도 없으며, 실정에 맞지도 않고 진리도 아니다. 설령 네가 아는 것이 많고 게다가 다른 이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할 수 있을지라도 그 앎이 하나님의 고유한 성품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너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너의 앎을 칭찬하기는커녕 그를 모독한 죄를 물어 보응을 받게 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앎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네 언변이 뛰어나 청산유수 같은 말로 죽은 것을 산 것으로 둔갑시킬 수 있고, 산 것을 죽은 것이 되게 할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앎을 얘기할 때면 너는 바로 문외한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네가 마음대로 평가하거나 칭찬할 수 있는 분도, 네가 마음대로 폄하할 수 있는 분도 아니다. 너는 어떤 사람이라도 칭찬할 수 있지만, 적당한 단어로 하나님의 ‘크나큰 은덕’을 함부로 묘사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모든 실패자의 깨달음이다. 수많은 언어 전문가들이 하나님을 한바탕 묘사할지라도 그 묘사의 정확성은 오히려 언어가 풍부하지는 않지만 체험이 풍부하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설명하는 진리의 1%밖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앎에서 중요한 것은 정확성과 실제에 있는 것이지, 언어의 교묘함이나 단어의 풍부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겠다. 사람의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하나님을 알아 가는 이 공과는 인류의 그 어떤 자연 과학을 배우는 것보다 높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극소수의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지, 재능이 있다고 해서 모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추구하는 일을 개구쟁이 어린이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어쩌면 너는 가정이나 사업 또는 결혼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을 수도 있지만, 진리와 하나님을 알아 가는 이 공과에서는 백지상태로 어떤 성과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너희에게 있어 진리 실행은 큰 난제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보다 더 큰 난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너희의 애로 사항이자, 모든 인류의 애로 사항이다. ‘하나님을 아는’ 이 사업에서 성과를 거둔 사람 가운데 합격한 사람은 거의 한 명도 없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지, 도대체 어느 정도에 이르러야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는지 모른다. 이런 것들은 모두 인류의 난제이자 가장 큰 수수께끼로서 그 누구도 답하지 못하고, 또 답하기를 원치 않는 문제이다. 인류 중 지금까지 이 일을 연구하여 성과를 거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3단계 사역’의 수수께끼가 인류에게 공개되고 나면 하나님을 아는 인재들이 잇달아 나타날 수도 있다. 물론 나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게다가 지금 그 사역에 착수하고 있다. 나는 머지않은 장래에 이러한 인재가 더 많이 나와 3단계 사역의 증인이 되는 모습을 보게 되길 바란다. 다시 말해, 그들이 3단계 사역을 증거하는 창시인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사역이 끝나는 날까지 그런 인재, 즉 성육신 하나님에 의해 직접 온전케 된 사람이 없거나 한두 명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정말 가슴 아프고 애석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최악의 경우를 생각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어쨌든 나는 진심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이 이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은 천고에 없었던 사역이고, 인류 발전의 역사에서도 없었던 위업이다. 정말로 ‘하나님을 아는’ 창시인이 된다면, 그것은 피조물 가운데 가장 높은 영광 아니겠느냐? 이런 사람이 바로 인류 가운데서 하나님께 가장 칭찬받는 피조물 아니겠느냐? 이 사역을 이루기는 쉽지 않겠지만, 마지막이 되면 성과를 거둘 것이다. 성별이나 국적과는 무관하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마지막에 하나님의 가장 높은 영광을 받는 사람이자 유일하게 하나님의 권병을 받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것은 현재의 사역이자 이후의 사역이고, 6천 년 사역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이루려는 최고의 사역이며, 또한 각 부류의 사람을 드러내는 사역의 방식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알게 하는 이 사역을 통해 각 부류 사람의 등급을 드러낼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약속을 이어받을 자격이 있는 자이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거나 약속을 이어받을 자격이 없는 자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지기(知己)이고,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하나님의 지기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지기는 하나님의 어떤 축복이든 다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지기가 아니라면 그 어떤 사역도 감당할 수 없다. 환난이든 연단이든 심판이든 모두 사람이 마지막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기 위한 것이며, 이는 마지막에 거두어야 할 유일한 성과이다. 3단계 사역을 모두 공개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나아가 하나님을 더 전면적이고 철저하게 깨닫는 데 도움이 된다. 이 모든 사역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5/31/2020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매일의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1>(발췌문 29)



하나님은 인류를 창조한 후, 인류가 패괴된 이후든 인류가 그를 따랐던 때든 상관없이 인류를 자신의 절친한 대상으로 여겼다. 그러니까 인류가 말하는 가장 가까운 존재라고 여겼지, 장난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님 스스로는 창조주이고 인류는 피조물이라고 한 이 말씀은 계급이 나뉘어 있다는 것처럼 들리지만, 하나님이 실제로 인류를 위해 한 모든 행사는 이런 관계를 한참이나 넘어서 있다. 인류를 사랑하고, 보살피고, 염려하고, 그리고 끊임없이 인류에게 공급하는 일까지, 그의 마음은 이런 것들을 가욋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고, 공로가 큰 일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 그는 인류를 구원하고 인류에게 공급하며 베푼 모든 것이 인류에게 엄청난 공헌을 한 일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 그는 그저 자신의 방식과 자신의 본질과 소유와 어떠함으로 조용하고 묵묵히 인류에게 공급하고 있을 뿐이다. 사람이 그에게서 얼마나 많은 공급과 도움을 받았든지 그는 사람에게 공을 요구할 생각이나 행동이 전혀 없다. 이는 하나님의 본질로 인한 것이자 진실로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난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에서나 다른 서적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부분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그래서 사람의 감사와 찬미를 받아 내려고 인류를 향해 하나님 자신이 왜 이렇게 행했고, 왜 이렇게 인류를 보살피는지 설명하거나 표현한 부분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그는 상심하거나 극심한 아픔을 느낄 때에도 인류에 대한 책임과 염려를 잊지 않고 그런 ‘상심’과 ‘아픔’을 홀로 묵묵히 감내한다. 오히려 그는 예전과 다름없이 이렇게 인류에게 공급한다. 비록 인류가 자주 하나님을 찬미하고 증거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이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그러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잘 대해 준 것을 가지고 사람의 은혜에 대한 감사나 보답을 받으려고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 하나님을 진실로 따르는 사람과 그의 말씀을 듣고 그에게 충성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자주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 하나님 쪽에서 이 축복은 조금의 아낌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께 받는 축복은 흔히 사람의 상상을 넘어서고, 사람이 한 행위와 사람이 들인 대가로 얻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때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 있느냐? 하나님의 심정이 어떨지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있느냐? 하나님이 받은 아픔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느냐? 정확히 말하자면, 없다! 노아를 포함해 인류가 당시 하나님의 슬픔과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왜 그런 언약을 세웠는지 느낄 수 있느냐? 느낄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슬픔과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슬픔과 아픔’을 미처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거리가 있거나 지위상의 차이가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어떤 감정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독립적이어서 사람의 관심과 이해와 헤아림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아픔도 희로애락도 없고, 괴로워하지도 근심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눈물도 흘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어떤 감정적인 표현도 필요치 않고, 그 어떤 감정적인 위로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가 어떤 상황에서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면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고, 사람의 ‘도움’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그와 반대로 ‘연약하고 어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위안과 공급과 격려가 필요하며, 나아가 언제 어디서든 감정적인 위로가 필요하다고 여긴다.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 이런 마음이 숨겨져 있다. 즉, 사람은 ‘약자’이니 하나님의 지극한 보호가 필요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돌봄’을 받아야 하며, 하나님에게서 자신이 받아야 할 모든 것을 받아야 한다는 마음이다. 반대로 하나님은 ‘강자’이고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니 사람의 수호자이자 축복자가 되어야 하고, 그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신통력이 굉장해서’ 사람에게서 더 이상 무엇을 얻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나타낸 모든 것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슬픔과 고통과 하나님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 하나님은 사람의 모든 행실을 훤히 알고 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든 모든 사람의 필요를 공급하고, 마음의 변화를 관찰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고, 인도해 빛을 비춰 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행한 이 모든 것과 들인 모든 대가에 대해, 성경이나 오늘날 하나님의 모든 말씀 가운데 하나님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분명히 요구하는 말씀을 찾을 수 있을까? 없다! 반대로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의 마음에 관심을 갖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사람을 끊임없이 인도하고 공급하며 도움을 준다. 그렇게 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도를 행하게 하여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예비한 아름다운 종착지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고 따르는 사람에게 그의 소유와 어떠함, 은혜와 긍휼과 모든 상을 아낌없이 베풀어 준다. 하지만 지금껏 그가 받은 슬픔과 아픔, 그리고 그의 마음을 사람에게 드러내 보인 적은 없다. 또한 아무도 그를 이해해 주지 않고, 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나님 쪽에서 원망한 적도 없다. 그는 묵묵히 이 모든 것들을 감내하며, 사람이 깨달을 그날을 기다릴 뿐이다.

여기에서 나는 왜 이런 말들을 할까? 이 말들에서 너희는 또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에는 사람이 가장 쉽게 간과하는 부분이 하나 있다. 이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위인이나 좋은 사람을 포함해 모든 사람이나, 사람들의 상상 속에 있는 ‘하나님’도 갖추지 못한 것으로 오직 하나님만이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심 없음이다. 사심 없음이라 하면 너는 자신도 매우 사심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네 자녀에 대해 한 번도 대가를 바라거나 셈을 따진 적도 없었고, 부모를 대할 때도 사심 없는 마음으로 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너는 최소한 ‘사심 없음’이라는 말에 대해 어떤 개념은 갖고 있을 것이다. ‘사심 없음’은 긍정적이고, 사심 없는 사람이 되는 건 무척 훌륭하다고 여긴다. 만일 너 자신이 사심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스스로를 아주 위대하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만물 속에서나 사람, 일, 사물 속에서나 하나님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의 사심 없음을 본 사람은 없다. 무엇 때문일까? 사람이 너무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사람은 물질세계에서 살고 있어서 하나님을 따른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어떻게 너에게 공급하고 사랑을 주고 염려하는지 영원히 보지 못하고 느끼지도 못한다. 네가 보는 것은 무엇일까? 네가 보는 것은 너와 혈연관계에 있는,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너를 몹시 아끼는 그 사람이다. 네가 본 것은 너에게 육적으로 유리한 것들이고, 네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네가 좋아하는 사람과 물질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사심 없음이다. 바로 이렇게 ‘사심 없는’ 사람이 오히려 그에게 생명을 준 하나님에게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 하나님과 비교해 볼 때, 사람의 ‘사심 없음’은 오히려 이기적이고 비열하다. 사람이 생각하는 ‘사심 없음’은 실제적이지 않은 공허한 것이고 불순물이 들어 있다. 하나님과 부합하지 않고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다. 사람의 ‘사심 없음’은 사람 자신을 위한 것이다. 반면 하나님의 ‘사심 없음’은 하나님의 본질이 진실로 나타난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사심 없음으로 인해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끊임없는 공급을 받게 되는 것이다. 너희는 오늘 내가 말하는 이 주제에 대해 깊이 느끼지 못하고 그저 머리를 끄덕여 인정하는 수준에 그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네가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되면 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발견하게 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네가 느낄 수 있는 사람과 일과 사물 속에서 오로지 하나님의 사심 없음만이 진정한 것이고 실제적인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오직 너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만이 무조건적이고 흠결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의 소위 사심 없음도 진실이 아닌 거짓되고 표면적인 것이다. 그것은 목적과 속셈이 있고 거래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검증을 이겨 낼 수 없는 것이다. 추하고 비열하다고까지 할 수 있다. 너희는 이 말을 인정하느냐?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5/24/2020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매일의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1>(발췌문 27)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전능신교, 동방번개
홍수 후 하나님이 노아에게 내린 축복 사진제공: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전능신교]

홍수 후 하나님이 노아에게 내린 축복


(창세기 9:1~6)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찌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여 방주를 지은 뒤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하는 날들을 보냈고, 그의 여덟 식구는 살아남았다. 노아의 여덟 식구 이외의 인류는 모두 멸망되었고, 땅의 생물들도 모두 멸망되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축복을 내렸다. 하나님은 노아와 노아의 아들에게 어떤 말씀들을 하였다. 이 말씀들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베풀어 주려는 것이자 노아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이는 하나님이 그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의 명령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주는 축복이고 약속이었다. 또한 하나님이 사람에게 상을 주는 방식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보기에 노아가 완전한 자이든 의인이든 상관없었고,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알든 상관없었다. 결국, 노아와 그의 세 아들은 하나님 말씀을 따랐고,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했으며,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리하여 홍수로 세상이 멸망된 뒤에도 하나님을 위해 인류와 각종 생물이 보존될 수 있게 하였고, 하나님의 다음 단계 경륜을 위해 혁혁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바로 노아의 이 모든 행위 때문에 하나님이 축복을 내린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사람에게 있어 노아의 행위는 언급할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노아도 한 일은 없잖아. 하나님이 노아를 남기겠다고 결정하셨으니 그는 당연히 남을 수 있었겠지.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그의 공로 때문이 아니야. 하나님이 이렇게 이루려고 하셨던 거지. 사람은 피동적이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보기에 위대한 사람이든 보잘것없는 사람이든 상관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의 명령과 받은 사명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협력하여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순조롭게 완수될 수 있도록 한다면, 하나님 입장에서 이런 행위는 하나님이 기억할 만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만하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의 이런 행위를 아끼며,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이런 정과 마음을 귀하게 여긴다. 이것이 하나님의 태도다. 그러니 하나님이 왜 노아를 축복했겠느냐? 하나님은 사람의 이런 행위와 순종을 아끼고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노아를 축복한 것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 말씀에 따르고 하나님을 흡족게 해 드리면 하나님은 당연히 사람을 축복해 주셔야 합니다. 이건 당연한 일 아닌가요?” 이렇게 말해도 될까? 어떤 사람은 “안 됩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면 왜 안 되는 것이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이 말도 완전히 맞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이 준 사명을 받아들였을 때, 사람의 행위의 좋고 나쁨, 순종했는지,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해 드렸는지, 그리고 그의 행위들이 합격점을 받을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데 있어 하나님은 한 가지 기준이 있다.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사람의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이 어떻게 행하든 행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당연히 축복해 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오해이다. 하나님은 일의 결과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일의 발전 과정 속에서 사람의 마음과 태도가 어떠했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핀다. 사람의 마음에 순종함이 있는지, 헤아림이 있는지, 하나님을 흡족게 하려는 염원이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당시의 노아는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너희가 지금 알고 있는 이치보다 많이 알고 있었을까? 하나님에 관한 개념이나 앎, 이런 진리에 대해 너희보다 더 많은 양육과 목양을 받았을까? 그렇지 않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현대인의 의식과 사상 속, 심지어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하나님에 관한 개념과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는 명확하지 않고 애매모호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태도를 보인다. 반면 노아의 마음과 의식 속에는 하나님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생각이 있었고, 노아는 이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노아의 순종에는 불순물이 없어 검증을 견뎌 낼 수 있었다. 그의 마음은 순결했고 하나님께 활짝 열려 있었다. 그는 하나님이 준 사명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수많은 이치상의 인식으로 하나님 말씀에 따르라고 자신을 설득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많은 사실들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필요도 없었다. 이것이 바로 노아와 현대인들의 본질적인 차이다. 또한 하나님 보기에 완전한 사람에 대한 진정한 해석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노아와 같은 사람을 원하고 인정한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축복하는 대상이다. 여기에서 너희는 어떤 깨달음을 얻었느냐? 사람은 사람의 겉모습을 보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내면과 본질을 본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사람이 그를 조금이라도 등한시하고 의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그 어떤 추측이나 시험도 용납하지 않는다. 현대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주하고 있고,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한다고까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 내면 깊은 곳에 존재하는 것과 패괴된 본질,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태도가 사람이 하나님을 참되게 믿지 못하도록, 그리고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그러기에 사람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준 것과 같은 축복을 받기 매우 어려운 것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

🌸 동영상 보기: 
      매일의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1>(발췌문 27)
      홍수 후 하나님이 노아에게 내린 축복


🌸 더 보 기 :

   ✔ 매일의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1>(발췌문 24)

   ✔ 매일의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1>(발췌문 25)







4/17/2020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말씀 찬양 CCM 2020 <바리새인이 예수를 대적한 근본 원인>


1
바리새인이 예수를 대적한 근본 원인을 알고 싶은가? 바리새인의 본질을 알고 싶은가?
그들은 메시야에 대한 환상이 가득하며 생명과 진리는 추구하지 않은 채 
메시야가 오실 거라고만 믿었다
그들은 진리와 생명의 말씀을 모른 채 여전히 메시야를 기다린다
2
어리석고 완고한 그들이 하나님의 축복 받거나 메시야를 보겠는가?
그들이 예수를 대적한 것은 예수께서 하신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알지 못하고 
메시야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메시야를 본 적도, 함께 지낸 적도 없기에 온갖 수단으로 그의 본질을 대적하며 
메시야란 이름만 헛되이 지켰다
3
바리새인들은 완고하고 교만하며 진리에 복종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원칙은 가르치는 진리가 아무리 높아도 권능이 아무리 커도
메시야로 불리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터무니없는 관점이 아닌가?
4
너희는 예수를 알지 못해 바리새인의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는가?
성령의 역사를 따를 줄 아는가? 진리의 말씀을 분별할 줄 아는가?
네가 그리스도를 대적하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면 너는 이미 죽음의 벼랑 끝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 ≪어린양을 따르며 새 노래 부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