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왜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이 그 이유를 찾고 있지만 답을 찾은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문아네는 가정의 변고를 겪고, 냉정한 세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고통의 근원을 알게 되고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을 얻는 길도 찾게 됩니다. 교회 영화 <내 집은 어디에> 명장면, '사람을 고통 속에서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을 보면서 함께 답을 찾아봅시다.
『진실한 기도란 어떤 것일까? 하나님께 마음을 털어놓고,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와 교제하면 그가 매우 가깝게 느껴진다. 하나님이 바로 네 앞에 있는 것 같고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생기며, 마음이 환해지고 그가 매우 사랑스럽게 느껴져 특별히 격려받는 느낌이 들게 된다. 그 기도를 듣는 형제자매들도 기쁨을 누린다. 네가 그들의 속마음과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 주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진실한 기도다. 진실한 기도를 하고 나면 마음이 평안하고 기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힘이 생겨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는 너의 기도가 결실을 맺었다는 증거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기도의 실천에 관하여> 중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최소한의 기준은 하나님께 마음을 활짝 여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진실한 마음을 드리고 진심을 말한다면, 하나님도 사람에게 역사하려고 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교활한 마음이 아니라 순수하고 정직한 마음을 원한다. 사람이 진심을 말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않고 그에게 역사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 진실한 말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자신의 부족함과 패역한 성품을 하나님께 고하며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열어야 하나님도 너의 기도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은 너를 외면할 것이다.』
『때로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은 명확한 언어로 하나님께 어떤 것을 해 달라고, 인도하고 지켜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임했을 때 진심으로 부르짖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겠느냐? 사람의 마음이 움직여 ‘하나님, 저는 이 일을 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연약하고 소극적으로 변했습니다.’라는 생각을 할 때, 하나님은 바로 알지 않겠느냐? 이러한 생각이 들 때, 사람의 마음은 진실한 것 아니겠느냐? 사람이 이렇듯 진실하게 부르짖는다면,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겠느냐? 때로 사람이 입을 열어 말하지 않았다고 해도 진심이 움직였다면 하나님은 응답한다. 어려움이 닥쳐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아무 데도 기댈 곳 없다고 느낄 때, 무력하다고 느낄 때, 사람은 유일한 희망을 하나님께 건다. 그럴 때 사람의 기도는 어떠하겠느냐? 그럴 때 사람의 마음가짐은 어떠하겠느냐? 참되지 않겠느냐? 거기에 불순물이 있겠느냐? 네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며 도와 달라고 간청할 때 비로소 네 마음에 진정성이 생긴다. 말은 몇 마디 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네 마음은 이미 움직인 것이다. 네가 참된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은 들어 주신다. 네 기도를 들었을 때 하나님은 네 어려움을 보고 너를 깨우치고 인도하며 도와줄 것이다.』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하나님을 믿을 때는 먼저 세상의 사악한 흐름을 꿰뚫어 봐야 한다> 중에서
『기도는 어떤 형식적인 절차를 거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 외우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기도는 말을 따라 하거나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고, 하나님과 마음을 나눔으로써 감동받아야 하는 것이다. 기도가 좋은 결실을 맺으려면 반드시 하나님 말씀을 읽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도해야 더 많은 깨우침과 빛 비춤을 받을 수 있다. 진실한 기도를 한 번 하고 나면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 요구에 부응하길 원하며 하나님이 증오하는 것을 증오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인식이 더해져 하나님이 밝혀 준 진리를 분명하게 알게 된다. 기도를 하고 나면 의지와 믿음이 생기고, 인식과 실천의 길이 생긴다. 그래야 진실한 기도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기도야말로 결실을 맺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누리고 하나님 말씀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바탕으로 해야 하며,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앞에서 평온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기도는 진정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경지에 진입한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기도의 실천에 관하여> 중에서
『나는 형제자매들이 날마다 진실하게 기도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것은 규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결실을 맺어야 하는 것이다. 잠을 조금 적게 자고, 조금 적게 누리더라도 이른 아침에 일어나 새벽 기도를 한 뒤 하나님 말씀을 누리기를 원하느냐? 이렇게 깨끗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신다면 더더욱 하나님께 열납될 것이다. 네가 매일 아침 이렇게 실천하고, 날마다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왕래한다면, 너는 하나님을 더 많이 알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뜻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너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나님, 저는 저의 본분을 다하기를 원합니다. 당신께서 저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저희에게서 증거를 누리실 수 있도록, 오로지 당신만을 위해 저를 온전히 바치길 원합니다. 제가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흡족게 하며 당신을 제가 추구하는 목표로 삼을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십시오.” 네가 이런 부담을 가진다면 하나님은 받드시 너를 온전케 할 것이다. 네가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기도한다면, 그것이 가장 진실한 기도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기도의 실천에 관하여> 중에서
🍄🍄🍄 참고 설교 🍄🍄🍄
『하나님과 참된 교제를 하면 다음의 몇 가지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과 교제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패괴된 실제 모습, 본성과 본질을 깨닫게 됩니다. 즉, 스스로를 알아 갈 수 있지요.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행한 일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 우리가 무엇으로 살아가는지를 돌이켜 봐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생명 진입이 있다는 증거지만, 만약 사탄의 철학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사탄의 본성이 드러난 것이므로 과오에 속합니다. 둘째, 하나님과 교제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하나님에 대해 참된 인식을 갖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교제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참된 인식을 갖게 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나며, 나중에는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과정에서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면 그것은 우리의 기도가 정상 궤도에 진입하지 못했으며, 하나님과의 교제에 실제가 없다는 뜻입니다. “나는 오랜 세월 기도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내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를 한 것에 해당할까요?”라며 궁금해하시는 분들도 있을 텐데요. 앞서 말한 몇 가지로 가늠하시면 됩니다. 기도를 통해 자기 자신을 알게 됐는지, 하나님의 뜻을 찾고 진리를 구하게 됐는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됐는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됐는지 등을 살펴보시면 됩니다. 만약 이러한 것이 전혀 없다면, 그 기도는 공허하고 의미 없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에 속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은 후 저는 마태복음 3장 17절에 기록된 성경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설교하실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도 ‘내 아버지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천 년간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다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일부 형제자매님은 성경에 이렇게 기록된 것을 보았습니다. 빌립이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시니 주님께서 빌립에게 말씀하셨습니다.“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한복음 14:9~10) 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요한복음 10:30) 그래서 일부 형제자매님은 혼란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신데 왜 주님께서는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라고 하신 걸까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마치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고 아버지와 아들로 나눌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인 걸까요 아니면 하나님 자신일까요?” 오늘 이 질문에 관해 이야기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목자이신 예수님 [사진제공: 전능하신하나님교회]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 인간 세상으로 오셔서 인류를 구속하시는 사역을 펼치신 후 율법시대가 막을 내리고 은혜시대가 시작되었고 예수님께서는 직접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고 지내셨습니다. 당시 성령께서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임을 증거하셨고 예수님 역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했고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말이 이때부터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아들이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말이 존재하는 것일까
성경을 본 형제자매님이라면 모두 성경 창세기에는 하나님께 아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기록되지 않았음을 알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율법시대 사역을 하실 때도 아들이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 제자들에게 분명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한복음 14:9~11),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자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성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시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영을 육신에 실제화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펼치시는 것입니다. 그분께는 정상적인 인성뿐만 아니라 완전한 신성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 본질은 바로 하나님 자신인 것입니다. 어떤 책에 적힌 내용처럼 말입니다. 『성육신 하나님을 가리켜 그리스도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이 입은 육신이며, 이 육신은 육에 속한 그 어떤 사람과도 다르다. 다르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육에 속하지 않은, 영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정상 인성과 완전한 신성을 모두 갖고 있으며, 그의 신성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다. 그의 정상 인성은 육신으로 하는 모든 정상적인 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신성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위한 것이다. 인성이든 신성이든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다. 그리스도의 본질은 영이자 신성이기에 그의 본질은 곧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다….』(<그리스도의 본질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중에서)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그분은 하나님 영이 실제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역하실 때 긍휼과 자애의 성품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렇게 율법시대가 끝나고 은혜시대가 시작되었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태복음 3:2)와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등의 가르침과 함께 사람이 새롭게 실천해야 할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은 모두 권능과 능력이 있어 사람의 병을 고쳐 주고 귀신을 쫓아내며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셨습니다. 또 말 한 마디로 바람과 바다를 잠재우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으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여 주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인류를 구속하는 사역을 완성하시고 인류의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역사 중 우리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은 모두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속성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생생하신 하나님 자신이며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나타나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며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
예수님의 기도 [사진제공: 전능하신하나님교회]
주 예수 기도
어쩌면 형제자매님들이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자신이라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왜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부르셨을까요?” 이 문제에 관하여 한 단락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 당시 예수가 기도할 때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단지 창조된 사람의 관점에서 부른 것이다. 단지 하나님의 영이 평범하고 정상적인 육신을 입었고, 피조물의 외형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은 하나님의 영일지라도 그의 겉모습은 여전히 정상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이 말하는 ‘인자’가 된 것이다. 여기에는 예수가 스스로를 ‘인자’라고 말한 것도 포함된다. 인자라고 말한 이상, 인자는 바로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의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다(남자든 여자든, 결국 모두 사람의 외형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너희가 처음에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과 같은 것이다. 바로 창조된 사람의 관점에서 부른 것이다. 너희가 외웠던 예수가 가르쳐 준 주기도문을 기억하느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는 모든 사람으로 이렇게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했다. 그 또한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너희와 평등한 선상에 서서 하늘의 하나님을 부른 것이다. 너희도 이렇게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이상, 예수는 자신을 너희와 평등한 지위를 가진 사람이자 하나님이 땅에서 택한 사람(하나님의 아들)으로 여긴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그것 또한 너희가 피조물이기 때문이 아니냐? 예수가 땅에서 얼마나 큰 권능을 가졌든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까지는 여전히 성령(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인자이자 땅의 피조물의 일원이었다. 그는 사역을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단지 자신을 낮추고 순종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하늘의 영)을 그렇게 불렀다고 해서 그가 바로 하늘의 하나님 영의 아들로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취한 관점이 다른 것이지 위격이 다른 것은 아니다….』(<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존재하는가?> 중에서)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을 때는 단지 피조물의 입장, 다시 말해 사람의 입장에서 부르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영의 아들임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예수님의 신분은 인자이시고 정상적인 인성이 있고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 없었으며 보통 사람들처럼 먹고 자며, 특별한 점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피조물의 입장에서 하나님께 기도드렸던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낮추심과 순종을 나타내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어떤 말투나 호칭으로 기도드렸건 그분의 본질은 성령의 지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또한 정상적인 인성과 함께 완전한 신성도 갖추셨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정식으로 사역을 하시는 기간에는 말씀을 선포하시거나 이적을 나타내신 것 모두 하나님 영의 지배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신분으로 모든 진리를 선포하실 수 있었고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나타내시어 사람에게 진리와 길, 생명을 베풀어 주셨으며 천국의 비밀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육신으로 오셔서 사역하신 것입니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왜 예수님을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증거하신 것일까
예수님이 세례를 받다 [사진제공: 전능하신하나님교회]
예수 세례
또 일부 형제자매님은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마태복음 3장 17절에 기록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다음 단락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예수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지 않았냐고 말한다. 예수를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라고 한 것은 당연히 하나님 자신이 말씀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증거한 것이다. 단지 다른 관점으로 그 자신을 증거한 것이고, 하늘에서 영의 관점으로 그가 입은 육신을 증거한 것이다. 예수는 그가 입은 육신이지 하늘에 있는 그의 아들이 아니다. 너는 이해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라는 예수의 말씀은 그들의 영이 원래 하나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냐?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위아래로 분리된 것이 아니냐? 사실, 여전히 하나이다. 어쨌든 하나님 스스로 자신을 증거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 하늘의 영은 단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했을 뿐, 하나님의 독생자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어떻게 독생자가 있겠느냐? 그렇다면 하나님은 사람이 되지 않겠느냐? 성육신함으로 말미암아 그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불렸다. 그리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생겨났는데, 그것은 단지 하늘과 땅에 있는 차이로 말미암은 것이다.』(<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존재하는가?> 중에서)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성령께서 말씀하신 ‘사랑하는 아들’은 하나님께서 영의 관점에서 그분이 성육신하시어 인자가 되었음을 의미하고, 자신을 위해 증거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을 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만약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직접 증거하셨다면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당시 사람들은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을 막 접했고 성육신에 대한 인식도 부족했습니다. 그들은 평범한 인자가 바로 하나님 영의 화신이고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것임을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말씀을 선포하고 역사를 하시며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고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을 보여 주셨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역사에서 그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고, 하나님께서 나타나심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저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이고 엘리야이며 선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의 분량을 생각하시어 예수님을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증거하셨습니다. 잠시나마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의 생각과도 맞고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도 쉬웠기 때문입니다. 당시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은 구속 사역이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뭐라고 칭하건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믿으면 그들의 죄는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을 갖추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신 것은 당시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신 선택입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의 분량과 무지함으로 우리의 나약함을 살피시는 하나님도 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애쓰시는 마음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본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여긴다면 그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한 사람으로 보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겠습니까?
위에서 교제한 이야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 자신이며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사역하신 몇 년에만 해당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구속 사역을 끝내신 후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말은 없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물 생명의 근원이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만물이 생존하고, 성장하고, 번식하며, 지속할 수 있도록 공급하는 근원이다. 하나님은 만물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고 있다. 사람에게 가장 기본적인 것이든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이든 인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고 있으며, 심령에 진리를 공급하기까지 한다. 모든 면에서 봤을 때, 하나님의 신분이나 지위로 봤을 때, 인류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만물 생명의 근원이다. 이는 거짓 없는 사실이다.』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 ・ 하나님의 권병(2) - 두 번째 관문, 성장 [사진제공: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한 사람이 어떤 가정 환경에서 어떤 가정 교육을 받는지는 그 사람이 태어난 가정에 의해 좌우되며, 이는 성장 배경을 결정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일생에서 두 번째로 거치게 되는 중요한 관문이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이 관문 역시 사람이 선택할 수 없으며, 정해진 것이고 이미 운명으로 예비되어 있는 것이다.
💁 1. 창조주는 모든 사람의 성장 배경을 안배하였다
한 사람이 성장 과정에서 어떤 사람과 일, 사물의 감화와 영향을 받는지, 어떤 지식을 배우고 어떤 능력을 갖추는지, 어떤 습관을 가지는지, 이 모든 것은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모, 가족, 주변의 사람과 일, 사물도 선택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주변 사람과 일, 사물과의 관계나 그것이 성장 과정에서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 역시 선택할 수 없다. 그럼 누가 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안배하는 것일까? 사람에게 선택권이 없는 이상 사람이 결정을 하는 것은 아니며,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은 더더욱 아닌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과 일, 사물은 창조주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확실하다. 창조주가 모든 사람의 출생 배경을 안배한 것처럼 특정한 성장 배경도 안배한 것이다. 한 사람의 탄생이 주변 사람과 일, 사물의 변화를 초래한다면, 그 사람의 성장 역시 주변의 사람과 일, 사물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집안의 몰락을 가져와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어떤 사람도 특정된 규칙에 따라 태어나지 않으며, 사람의 성장 배경에 규칙과 필연성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은 사람이 상상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운명에서 비롯되고 운명에 의해 결정된다. 결국에는 창조주가 정해 놓은 운명, 그가 주재하고 안배한 운명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 2. 사람의 여러 가지 역할은 다양한 성장 배경에 의해 결정된다
사람의 기본적인 성장 환경과 배경은 출생 배경에 의해 결정된다. 또한, 성장 배경은 출생 배경에서 비롯된다. 사람은 이 시기에 언어를 배우면서 새로운 것을 접하고 받아들인다. 새로운 것을 접하고 받아들이면서 계속해서 성장해 나간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뇌로 받아들이면서 조금씩 생각을 키우고 적극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한다. 사람이 접하는 사람과 일과 사물, 사람이 배우는 다양한 상식, 지식, 능력과 사람에게 주입되어 영향받는 다양한 생각이 삶의 운명을 이끌고 영향 준다. 성장 과정에서 배우는 언어와 가지게 되는 생각은 모두 성장 환경과 직결되어 있다. 성장 환경은 부모, 형제, 주변의 사람과 일, 사물을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한 사람의 성장은 그 사람이 성장기에 생활하는 환경과 이 시기에 접하는 다양한 사람과 일, 사물에 의해 결정된다. 사람의 성장 배경이 정해져 있는 이상 성장기에 생활하는 환경 역시 운명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성장 환경은 사람의 선택이나 선호가 아닌 창조주의 계획, 그의 세심한 안배, 삶의 운명에 대한 그의 주재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치는 성장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이나 접하는 사물은 모두 창조주의 계획, 안배와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 사람은 이렇게 복잡하게 얽혀 있는 관계망을 예상할 수도, 통제할 수도, 짐작할 수도 없다. 모든 사람의 성장 배경은 서로 다른 사람과 일과 사물, 많은 사람과 일과 사물과 맞닿아 있다. 아무도 이렇게 거대한 관계망을 계획하거나 안배할 수 없다. 각 부류의 사람과 일과 사물의 출현, 지속, 소멸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과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창조주만이 가능할 뿐이다. 사람과 일, 사물을 연결하는 방대한 관계망은 창조주의 예정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이 성장할 수 있도록 하고, 성장 과정에 필요한 다양한 환경을 마련한다. 또한, 창조주의 경영 사역에 필요한 다양한 역할을 결정하고, 사람이 저마다의 사명을 순조롭게 완수할 수 있도록 든든한 기반을 구축한다!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 ・하나님의 권병(2) - 첫 번째 관문, 탄생 [사진제공: 전능하신하나님교회]
어디에서 또는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는지, 어떤 성별과 외모로 태어나는지, 언제 태어나는지, 이것은 모든 사람이 거쳐야 할 첫 번째 관문과 관련된 몇 가지 내용이다.
첫 번째 관문의 이 몇 가지는 창조주가 운명으로 정해 놓은 것으로서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외부 환경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 인위적인 요인은 창조주가 운명을 정한다는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 한 사람의 탄생은 창조주가 그 사람의 운명에 대한 첫 번째 단계를 완성하였음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은 창조주가 운명으로 정해 놓은 것이므로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앞으로의 운명과 상관없이 사람이 어떤 배경에서 태어날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따라서 출생 배경은 삶의 운명에 의해 좌우되지 않으며, 창조주가 삶의 운명에 행사하는 주재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1.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창조주의 안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첫 번째 관문과 관련된 출생지, 태어날 가정, 성별, 외모, 출생 시간 중에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느냐? 사람이 ‘자신의 의지로 태어나는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자신도 모르게 어떤 시점에, 어떤 곳이나 어떤 가정에서, 어떤 외모를 가지고 태어나 자기도 모르게 한 가정의 일원, 한 가정의 자녀가 된다. 삶의 첫 번째 관문에서 사람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창조주의 안배로, 정해진 환경에서 태어난다. 태어날 가정, 성별, 외모뿐만 아니라 사람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출생 시간 역시 정해져 있다. 이 중요한 관문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출생과 관련해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새로운 생명이 이 세상에 올 때 창조주의 예정과 인도가 없다면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에서 머물러야 할지 알지 못할 것이고, 가족, 귀속, 진정한 가정도 없게 될 것이다. 창조주의 세심한 안배로 머무를 곳을 찾고 부모, 귀속, 가족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이 생명의 인생 여정이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창조주의 안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며, 새로운 생명이 가지게 될 모든 것은 창조주가 부여하는 것이다. 새로운 생명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표류체에서 조금씩 피와 살이 있고 모양을 갖춘 사람으로 만들어진다. 그 생명은 사고를 하고 숨을 쉴 수 있다. 따뜻함과 냉정함을 느끼고 물질세계의 여느 피조물과 다를 바 없이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 또한, 창조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게 될 세상만사를 경험하게 된다. 창조주가 한 사람이 태어나게 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사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부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은 사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창조주로부터 선사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또 다른 형태로 창조주로부터 필요한 것을 공급받고 그의 주재 아래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사람의 출생 배경이 각양각색인 이유
다시 태어나면 명문가에서 태어나겠다고 욕심을 부리는 사람이 많다. 여성의 경우, 공주 같은 외모로 모두의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어 한다. 남성의 경우, 먹고 살 걱정 없이 떵떵거리며 사는 왕자를 꿈꾼다. 이렇게 원하는 출생 배경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동시에 태어난 가정부터 외모, 성별, 심지어 출생 시간까지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것에 큰 불만을 느낀다. 그런데 사람은 왜 그런 가정에 태어났는지, 왜 그런 외모를 타고났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어디에서 태어나든, 어떤 외모로 태어나든, 사람이 창조주의 경영을 위해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고 정해진 여러 가지 사명을 완수하는 이 근본 취지는 영원히 바뀔 수 없다. 창조주의 눈으로 보면 사람이 어디에서 태어나고, 어떤 성별로 태어나고, 어떤 외모를 가지는지는 잠시 스쳐 가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런 것은 창조주가 인류 전체와 삶의 각 시기를 경영하기 위해 사용하는 작은 기호나 상징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사람의 진정한 종착지와 결말은 한 시기의 출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매번 사명과 창조주의 경륜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창조주가 내리는 결정에 의해 좌우된다.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고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기 마련이라는 말처럼 한 사람의 탄생은 전생, 금생과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 한 사람의 죽음이 이번 윤회의 끝이라면 한 사람의 탄생은 당연히 새로운 윤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나간 윤회가 전생이라면 새로운 윤회는 당연히 금생으로 볼 수 있다. 한 사람의 탄생이 전생, 금생과 관계가 있다면 그 사람이 태어난 곳, 가정, 성별, 외모 등 모든 요인 역시 전생, 금생과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는 사람의 출생과 관련된 모든 요인이 전생의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금생의 운명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출생 배경이 각양각색인 것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는 사람이 있다.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명문가에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 남쪽에서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북쪽에서 태어나는 사람이 있다. 사막에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오아시스에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 환호, 웃음, 축하를 동반하는 탄생이 있는가 하면 슬픔, 불운, 걱정을 유발하는 탄생도 있다. 태어날 때부터 집안의 복덩이로 불리는 사람도 있고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 사람도 있다. 외모가 반듯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목구비가 조화롭지 않은 사람도 있다. 외모가 준수한 사람도 있고 부족한 사람도 있다. 한밤중인 자시에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태양이 중천에 떠오른 오시에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 사람마다 제각각인 출생 배경은 창조주가 정한 운명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그에 따라 금생의 운명, 금생에서의 다양한 역할과 사명도 결정된다. 이 모든 것이 창조주의 주재와 예정하에 이루어지며, 아무도 그가 정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의 출생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창세기 22장 17절에서 18절을 보자.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였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여러 차례 축복하며 그의 자손을 크게 성하게 하리라고 했다. 그 정도가 얼마나 된다고 했느냐? 성경 구절처럼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줄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그저 형상적인 언어일 뿐이다. 하지만 이 형상적인 언어를 통해 하나님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줄 후손이 한둘이 아니고 수천수만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 나라를 이룰 정도가 된다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여러 나라의 아비가 되리라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 정도까지 많게 할 수 있는 것은 사람에게 달린 일이냐, 하나님에게 달린 일이냐? 자신의 후손이 얼마가 될지 사람이 통제할 수 있느냐?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느냐?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아지게 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후손이 몇 명일지조차도 사람은 결정할 수 없다. 누가 자신의 자손이 별과 같이 많아지기를 바라지 않겠느냐? 하지만 아쉽게도 세상일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의 능력이 얼마나 되든, 재능이 얼마나 뛰어나든 상관없이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그 누구도 하나님의 예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이 너에게 주는 대로 받는 것이다. 하나님이 네게 적게 주었는데 네가 너무 많이 받게 되는 법은 없다. 하나님이 네게 많이 준다면, 네가 많다고 탓해서도 안 된다. 그렇지 않으냐?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결정하는 것으로, 사람이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람은 다 하나님의 주재 아래에 있으며,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네 씨로 크게 성하게 하리라고 한 말씀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언약이다. 이 언약은 ‘무지개 언약’처럼 영원히 지켜질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이기도 하다. 이러한 약속을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으며, 사람이 믿든 안 믿든, 받아들이든 못 받아들이든,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 보든,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의지나 생각이 바뀐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니며, 그 어떤 사람이나 사물의 변화에 의해 변하는 것도 아니다. 만물이 사라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는다. 반대로, 만물이 사라지는 그날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히 이뤄지는 날이다. 이는 그가 창조주이기 때문이다. 그는 창조주의 권병을 지녔으며, 창조주의 능력이 있고, 만유와 모든 생명을 주관한다. 그는 무에서 유를, 유에서 무를 가능케 하며, 모든 생과 사의 전환을 주관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자손을 번성케 하는 것이 하나님께 있어서는 지극히 간단한 일인 것이다. 이 일이 사람이 듣기에는 천일야화나 동화 속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기에, 하나님이 하고자 결정한 일이나 사람에게 약속한 일은 천일야화나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본 사실이며,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는 이러한 체득이 있느냐? 이런 것은 사실로 증명되고 있다. 아브라함의 후예가 많지 않으냐? 얼마나 많으냐?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과 같지 않으냐? 각 나라, 각 지역, 세계 각지로 널리 퍼져 있지 않으냐? 이러한 사실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냐? 하나님 말씀의 권병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난 후, 몇백 년 혹은 몇천 년 동안 그 말씀이 계속해서 이뤄지고, 끊임없이 현실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의 위력이자 하나님 권병의 증거이다. 하나님이 만유를 창조할 때,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 이는 순식간의 일로, 아주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일이다. 이러한 일의 성취와 응답은 시간 차 없이 즉시 이루어진 경우이다. 이 또한 다 하나님의 권병이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한 일로 사람들에게 하나님 권병의 또 다른 면의 본질을 볼 수 있게 하였다. 또 사람들에게 창조주의 권병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음을 깨달을 수 있게 하고, 창조주 권병의 더 실질적이고 더 훌륭한 면도 느끼게 하였다.
하나님이 말씀하자마자 하나님의 권병은 그 사역을 주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이 약속한 것들이 점차 현실이 되기 시작하였다. 만물의 모든 것들이 다 이로 인해 다양한 변화를 맞았다. 일례로, 봄이 오면 풀이 파릇파릇해지고 꽃이 피고 나무에 싹이 튼다. 새들이 노래하기 시작하고 기러기들이 돌아오며, 논밭에는 사람들의 일손이 분주해진다…. 이에 발맞춰 만물도 다시 소생한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의 놀라운 행사인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약속을 이룰 때, 하늘과 땅의 만물이 다 하나님의 생각에 따라 새로워지고 변화되는데, 그 어떤 것도 예외일 수는 없다.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을 이루기 위해 만물이 다 힘쓰며 움직이게 된다. 모든 피조물들이 다 창조주의 권세 아래에 지배되고 안배되어 각자의 역할을 다하고 각자의 기능을 다한다. 창조주의 권병은 이렇게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너는 하나님의 권병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 하나님의 권병에 범위가 정해져 있느냐? 하나님의 권병에 시간적 제약이 있느냐? 하나님 권병의 높고 낮음과 길고 짧음을 논할 수 있느냐? 크고 작음과 강함과 약함을 논할 수 있느냐? 사람의 기준으로 헤아릴 수 있느냐? 하나님의 권병은 사라졌다 나타나고 있다가도 없는 것이 아니며, 아무도 그의 권병이 얼마나 큰지를 가늠할 수 없다.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축복하면,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지 간에 그의 그 축복은 지속된다. 그 지속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권병을 증거하고, 인류에게 창조주가 가진 영원불멸의 생명력이 수없이 재현됨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의 권병이 나타날 때마다 그의 말씀을 완전하게 구현해 내어 만물과 인류에게 보여 준다. 그리고 그의 권병으로 이뤄진 일마다 더없이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완전무결하다. 그의 생각, 그의 말씀, 그의 권병과 그가 이룬 일마다 전부 그 어떤 것도 비할 수 없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피조물에게 있어서 그 의의와 가치는 인류의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약속한 후에는, 그 사람이 어디서 태어났든, 무엇을 하든, 약속받기 전후의 그의 사정이 어떻든, 그의 생존 환경에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났든, 하나님은 그것을 다 환히 알고 있다. 하나님이 한 말씀이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하나님이 보기에는 다 방금 일어난 것과 같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인류에게 한 모든 약속을 추진하고 주관하고 실현시키는 능력과 권병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 약속이 무엇이든 간에,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든, 그 약속을 이루는 데에 필요한 요소, 예를 들면 시간, 장소, 종족 등과 같은 요소의 범위가 얼마나 넓든, 그 약속은 이루어지고 실현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하나님께 있어서 전혀 힘들지 않은 아주 간단한 일이다. 이것은 무엇을 증명하느냐?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이 주관하는 범위는 우주 전체, 인류 전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빛을 만들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빛만 관리한다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 물을 만들었으니 물만 관리하고, 나머지 일은 하나님과 무관하다고 한다면 오해가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한 일이 몇백 년이 지난 뒤에는 사람의 기억에서 희미해졌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기에 그 약속은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이루어져 가는 과정에 있고, 단 한순간도 멈춘 적이 없었다. 그 기간에 하나님이 어떻게 그의 권병을 행하였는지, 또 만물을 어떻게 지배하고 안배했는지,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 가운데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는지는 인류가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권병과 그의 행사에서 나타난 탁월한 면면들은 만물 가운데 전해지고 칭송되고 있다. 만물은 또한 창조주의 놀라운 행사를 나타내며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창조주가 만물을 주재하는 갖가지 미담들은 만물을 통해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만물을 주재하는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은 만물에게 하나님이 어디에나 다 존재하고 항상 존재함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이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것을 보게 될 때, 너는 하나님은 어디에나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은 시간, 지리, 공간, 그리고 그 어떤 사람과 일, 사물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의 범위는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며, 사람이 헤아릴 수도 없고 상상하기도 어려우며, 영원히 다 알 수 없는 것이다.
추리하기 좋아하고 상상하기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상상력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이 세계를 초월할 수 있느냐? 사람의 추리와 상상력으로 하나님 권병의 진정성과 확실성을 만들어 낼 수 있느냐? 사람에게 하나님의 권병을 알게 할 수 있느냐? 진정 하나님의 권병을 깨닫고 순종하게 할 수 있느냐? 사람의 추리와 상상력은 사람 두뇌 작용의 산물일 뿐, 하나님의 권병을 아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 증거하고 있다. 공상 과학 소설을 읽어 본 사람은 달이 어떤 모양인지 상상할 수 있고, 우주의 행성들이 어떠한지를 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람이 하나님의 권병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람의 상상은 그야말로 상상일 뿐이며, 사실이 어떤지, 다시 말해서 그 일련의 사건들과 하나님의 권병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사람의 생각으로는 절대 알 수 없다. 설사 네가 달에 가 봤다 한들 어쩌겠느냐? 하나님의 권병에 대해 여러 측면으로 다 알았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의 범위가 얼마나 큰지 상상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사람의 추리와 상상력으로는 하나님의 권병을 알 수 없다면, 사람은 어찌해야 하겠느냐? 가장 현명한 선택은 추리하지 않고 상상하지 않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권병을 알아 가는 데에 있어, 절대 상상력이나 추리에 의존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 하나님 자신의 신분, 그리고 하나님의 본질은 너의 상상력으로 인식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상상력으로 하나님의 권병을 알 수 없다면, 어떤 방법을 통해야 하나님의 권병을 진정으로 알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것과 교제를 통해, 또한 하나님 말씀을 체험하는 것을 통해 점차적으로 체득하고 점차적으로 실증하면서 알아 가고, 점점 더 깊이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권병을 알아 가는 유일한 방법이며, 이외에는 다른 첩경이 없다. 너희에게 상상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그저 앉아서 기다리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다. 머리로 생각하고 상상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논리로 추리하지 말고, 지식으로 분석하지도 말며, 과학을 근거로 삼지도 말라는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통해, 삶 속에서 접하게 되는 매사를 통해 네가 믿는 하나님이 권병을 가진 분이라는 것을 느끼고 증명하고 실증하라는 것이다. 또한 그가 너의 운명을 주재하고 있으며, 그의 능력은 항상 그가 진정한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음을 실증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경로인 것이다. 혹자는 더 간단한 방법으로 이 목표에 이르고 싶다고 말하는데, 그런 간단한 방법을 너희는 생각해 냈느냐? 내가 말하지만 다른 길은 없다! 그러니 너는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다.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선포한 모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행한 모든 일을 통해 성실하고 착실하게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을 인식하고 증명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알아 가는 유일한 길이다.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 하나님의 모든 것은 공허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다.
👉 창조주가 만물 생령을 주관하고 주재하는 사실은 창조주의 권병이 진실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욥기에도 마찬가지로 욥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은 욥에게 무엇을 주었느냐?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 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욥 42:12). 인류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욥에게 베풀어 준 것들은 무엇이냐? 사람의 재산이 아니냐? 이런 재산을 소유한 욥은 그 시대에 아주 부유하지 않았겠느냐? 욥은 그 재산들을 어떻게 소유하게 된 것이냐? 그의 부는 어떻게 생긴 것이냐? 그런 재산은 당연히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소유하게 된 것이다. 욥이 그 재산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하나님의 축복을 어떻게 대했는지는 여기서 우리가 언급할 주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축복에 대해 말하자면, 하나님의 축복은 모든 사람이 꿈에도 그리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일생 동안 재산을 얼마나 얻을 수 있는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는 사람이 주관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재산을 베풀어 주고 축복을 줄 수 있는 권병과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하나님의 축복에는 원칙이 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복을 주느냐? 당연히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다! 아브라함과 욥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실은 같지만,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축복은 다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이 모래와 같이, 별과 같이 많으리라고 축복하였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준 이 일에 대해 말하자면, 하나님은 한 사람의 후손, 한 종족을 강성해지게 한 것이다. 이 일에서 하나님이 권병으로 주재한 것은 만물 생령 중에서 하나님의 생기를 받은 인류이다. 하나님 권병의 주재하에 이 인류는 하나님이 정한 범위와 속도에 따라 종족을 번식하며 생존해 나간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바로 이들 족속의 생존 능력, 번성 속도, 수명은 다 하나님이 지배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행한 이 모든 것의 원칙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에 근거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상황이든지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 권병의 보호하에 막힘없이 순조롭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에 대해 말하자면 천지개벽이 일어나도, 어떤 시대에서도, 인류가 어떤 재난을 겪어도 아브라함의 후손은 다 죽음이라는 재앙의 위협에서 안전할 것이며, 그 족속은 소멸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욥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그를 매우 부유하게 만든 것이다. 하나님이 욥에게 준 것 가운데, 숨 쉴 수 있는 각종 살아 있는 생명체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 생명체의 수, 번식의 속도, 생존율, 얼마나 실할지 등등 이러한 구체적인 사항들도 다 하나님의 주관하에 있다. 이 생명체 또한 언어 능력은 없지만 마찬가지로 창조주의 지배하에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지배하는 원칙은 욥에게 약속한 축복에 근거한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욥에게 준 축복에 대해 말하자면, 약속의 내용은 다소 차이가 날지라도 만물 생령을 주재하는 창조주의 권병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의 세부적인 내용은 다 아브라함과 욥에 대한 서로 다른 약속과 축복 가운데에서 구현되고, 또 한 번 인류에게 하나님의 권병은 사람의 상상으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세부적 내용은 또 한 번 인류에게 오직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는 가운데서만 하나님의 권병을 알 수 있다고 알려 준다.
만물을 주재하는 하나님의 권병에서 사실을 하나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권병은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고 궁창이 있으라 하니 궁창이 생겼고 뭍이 드러나라 하니 뭍이 드러났다’는 이런 말씀에서만 구현된 것이 아니다. 더 많은 부분은 하나님이 어떻게 빛을 지속시키고, 궁창이 사라지지 않게 하며, 뭍을 영원히 물과 나뉘게 하느냐에서 구현된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빛, 궁창, 뭍과 같은 피조물들을 주재하고 관리하느냐의 구체적인 내용에서 구현된다. 인류에게 준 하나님의 축복에서 너희는 또 무엇을 보았느냐? 아브라함과 욥에게 복을 준 후에, 하나님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권병이 이제 막 행해지기 시작하였고, 그가 자신이 한 모든 말씀을 현실로 이루고, 자신이 한 말씀의 모든 세부 사항을 실현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후의 세월 속에서 그가 하고자 한 모든 일들을 계속하였다. 어쩌면 사람은 하나님께 권병이 있기 때문에 말씀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만사 만물이 다 이루어진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이런 상상은 황당한 면이 없지 않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사람과 언약을 세우고,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룬다는 것에 대해, 만일 네가 단편적으로만 보고 하나님의 권병으로 주재하는 만물이 생존하는 각종 현상과 사실들을 보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권병에 대한 너의 이해는 공허하고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이러한 상상은 하나님에 대한 앎이 이미 미궁에 빠져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람의 상상 속 하나님은 명령만 내리는 기계일 뿐, 권병을 가진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욥의 사례를 통해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의 실제적인 면을 보지 않았느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욥을 축복한 후에 가만히 계신 것이 아니고, 사자에게만 시키고 자신은 결과만 기다린 것이 아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있자마자 만물은 하나님 권병의 인도하에 하나님이 행하고자 하는 사역에 협력하여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과 사물을 예비하였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하나님의 권병은 온 땅에서 행해졌고, 아브라함과 욥에게 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고 응답하기 위한 길을 열었다. 그뿐만 아니라, 앞으로 진행될 각각의 절차와 모든 중요한 부분에 필요한 것들을 다 계획하고 예비하였다. 그 기간에 하나님이 움직인 것은 하나님의 사자들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자들에게만 권병을 행한 것이 아니라 만물도 움직여 하나님이 이루려는 사역에 협력하게 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권병을 구체적으로 행하는 방식이다. 너희들 가운데, 하나님의 권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즉, 하나님은 권병과 능력이 있기 때문에 셋째 하늘이나 어떤 고정된 자리에 계시면서 그 어떤 구체적 사역을 행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모든 사역이 다 생각으로 완성될 것이라고 말이다. 사람들은 또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었지만, 하나님은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이 그저 말 한마디로 충분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실이 그러냐? 확실히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권병과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의 권병은 진실하고 실제적인 것이지 절대로 공허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의 진정성과 실제성의 단면은 그가 만물을 창조하고 만유를 주관하며, 그가 인류를 인도하고 경영하는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나타나고 구현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주재하고 만물을 주재하는 각각의 방식, 각각의 측면, 각각의 세부 내용과 그가 이룬 모든 사역, 그리고 만물에 대한 그의 이해는 확실히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이 공허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의 권병과 능력은 항상 모든 일에서 나타나고 구현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권병이 실제로 존재함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시시각각 자신의 권병과 능력으로 계속 사역하며, 만물을 주관하고 주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능력과 권병은 천사와 하나님의 사자를 포함해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어떤 축복을 주고, 욥에게는 또 어떤 것을 축복하였는지,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결정한 것이며, 하나님이 말씀한 대로 된 것이다. 설사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이나 욥에게 직접 임했을지라도, 그들이 한 것은 다 하나님의 지시대로 한 것이며, 모두 하나님의 권병 아래에 있고, 그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주재 아래에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성경 기록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임한 것을 보았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무엇을 하였는지 보지 못했을지라도, 사실상 진정한 능력과 권병으로 행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 자신이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설사 네가 천사나 사자에게 큰 능력이 있어 그들이 이적과 기사를 행하거나 하나님이 준 사명을 받고 일련의 일을 행하는 것을 보았을지라도, 그들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이 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것일 뿐, 절대로 하나님의 권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만물을 창조하고 주재하는 창조주의 권병을 가진 사람이나 사물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창조주의 권병을 행하거나 나타낼 수 없다.
👉 창조주의 권병은 영원히 바뀌지 않고 거스를 수 없다
이상 세 부분의 성경 말씀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이 그의 권병을 행할 때 원칙이 있다는 것을 보았느냐? 예컨대, 하나님은 무지개로 사람과 언약을 세웠는데,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며 사람에게 더 이상 홍수로 세상을 멸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지금 사람들이 보는 ‘무지개’가 하나님이 당시에 말씀하였던 그 ‘무지개’가 아니냐? 그 무지개의 성격과 의미에 변화가 있느냐? 확신하건대 어떤 변화도 없다. 하나님은 그의 권병으로 그 일을 행하였고, 사람과 세운 언약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 ‘언약’이 언제 변할지는 물론 하나님이 결정한다.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라고 말씀한 후에, 하나님은 지금까지 그 ‘언약’을 지키고 있다. 이 일에서 너는 또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은 권병과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일할 때는 매우 신중하고 원칙이 있으며 신용을 지킨다. 그의 신중함과 그가 일하는 원칙은 거스를 수 없는 창조주의 성품과 뛰어넘을 수 없는 창조주의 권병을 나타내고 있다. 그가 지고지상한 권병을 가지고 있고, 만물이 모두 그의 권세 아래에 있을지라도, 그가 만물을 주재하는 능력을 갖추었을지라도 단 한 번도 자신의 계획을 파괴한 적도 방해한 적도 없다. 그는 권병을 행할 때마다 항상 자신의 원칙을 엄격하게 지키며, 그가 말씀한 대로, 그가 계획한 절차와 목표대로 정확하게 진행한다. 두말할 것 없이 하나님이 주재하고 있는 만물 역시 하나님 권병의 행사 원칙을 따르고 있다. 그의 권병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가 없고, 그의 권병의 행사 원칙을 바꿀 수 있는 존재도 없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복받는 자는 그의 권병으로 말미암아 축복을 받게 되고, 저주받는 자 역시 그의 권병으로 말미암아 벌을 받게 된다. 하나님 권병의 주재하에, 하나님 권병의 시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가 없으며, 하나님 권병의 행사 원칙을 바꿀 수 있는 존재도 없다. 창조주의 권병은 그 어떤 요인의 변화로도 바뀌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의 권병의 행사 원칙 역시 그 어떤 원인에 의해서도 바뀌지 않는다. 천지가 격변한다 하더라도 창조주의 권병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만물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창조주의 권병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영원히 바뀌지 않고 거스를 수 없는 창조주 권병의 본질인 것이다. 이 역시 창조주의 유일성인 것이다!
기독교 영화 <내 일에 참견하지 마세요!>명장면(5)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리새인의 진상을 밝히다[사진제공: 전능하신하나님교회]
예수님이 오셔서 사역하실 때, 유대교의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광적으로 예수님을 비방하고 정죄하고 모독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가로막으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리고 말세에 하나님은 다시 말씀이 육신 되어 세상에 나타나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이때에 종교계 목사들이 일어나 하나님의 말세 사역에 맞서고 정죄하며, 성도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럼, 두 번 성육신하신 하나님은 왜 똑같이 교계 지도자들의 대적과 정죄를 받으셔야 할까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들의 실체와 근원은 무엇일까요?
주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겸손하고 오래 참으며, 바울을 본받아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힘써 사역하기만 하면 주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라 생각하면서 주님이 재림하실 때 들림 받아 천국에 갈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추구하면 정말 주께 인정받고 들림 받아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만약 현실이 이와 다르다면, 도대체 어떻게 추구해야 주께 인정받고 들림 받아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