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하려고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하다 사진제공: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전능신교] |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하려고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하다
(창 6:18~22)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 수 한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 너는 먹을 모든 식물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식물이 되리라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이 성경 말씀을 통해 노아라는 사람에 대해 대략적으로 알 수 있었지 않느냐? 노아는 어떤 사람이었느냐? 본문에 이렇게 나와 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지금 사람들의 이해에 의하면 그 당시 ‘의인’은 어떤 사람일까? ‘의인’은 완전한 자여야 한다. 완전한 자란 사람의 눈에 완전한 자인지, 하나님의 눈에 완전한 자인지, 너희는 아느냐? ‘완전한 자’란 의심할 바 없이 하나님의 눈에 완전한 자이지 사람의 눈에 완전한 자가 아니다. 이건 분명하다! 사람은 눈이 멀어 보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온 땅을 감찰하고 모든 사람을 감찰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노아가 완전한 자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할 계획은 노아를 부른 그 순간부터 시작된 것이다.
노아가 부름을 받은 일은 단순한 사실이지만, 이 기록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뜻과 본질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이것이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뜻과 본질을 이해하려면 먼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부르는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부르는지 알게 되면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뜻과 본질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무척 중요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부른 사람은 하나님이 보기에 어떤 사람일까? 분명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그의 명령대로 행할 수 있는 사람이다. 동시에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이 다해야 할 책임과 본분으로 여겨 완수하는 사람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어야 할까? 아니다. 당시 노아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많이 듣지 못했고, 하나님의 사역도 경험하지 못했다. 그래서 노아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너무 적었다. 성경에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과연 노아가 하나님의 본체를 본 적이 있을까? 분명히 말하지만 본 적이 전혀 없었다! 당시 사람에게 임한 것은 하나님의 사자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해 말을 하고 일을 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전달했을 뿐이었다. 하나님의 본체가 직접 사람에게 나타난 적은 없었다. 이 성경 말씀에서 기본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노아라는 사람이 해야 할 일과 노아에게 내린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하나님이 나타내고 있는 본질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행하는 모든 일은 세밀하게 계획된 것이다. 어느 사건 혹은 현상이 발생했을 때 그에게는 이를 판단하는 기준이 있다. 그는 이 기준에 따라 계획하고 처리할지 혹은 어떤 식으로 이 일과 현상을 대할지를 결정한다. 그는 모든 일에 무관심하거나 아무 느낌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였다.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하나님은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멸하려고 한 대상이 사람뿐이라고 했느냐?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혈육 있는 생물을 멸하겠다고 하였다. 왜 멸하려고 했을까? 여기에서 또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난다. 즉, 하나님이 인류의 패괴, 모든 혈육 있는 자의 더러움과 강포, 패역을 대할 때 그의 인내에는 한도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한도는 어디까지일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였다.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여기에서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는 무슨 의미일까?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하나님께 번제를 드린 적이 있는 사람, 말로 하나님을 인정할 뿐 아니라 찬미하기까지 하는 사람을 포함해 모든 살아 있는 존재, 이들의 행위가 심히 패괴하여 하나님 앞에 상달되면 하나님은 그들을 멸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한계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인류와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패괴함을 어느 정도까지 인내한다는 것이냐?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든 이방인이든 그들이 바른길을 가지 않는 지경에 이르면, 하나님은 인내하지 않는다. 인류가 그저 도덕이 부패하고 사악으로 가득 찬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 없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주재하고 사람에게 광명과 바른길을 가져다줄 수 있음을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는 지경에 이르면, 하나님은 인내하지 않는다. 인류가 하나님의 존재를 증오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면, 하나님은 인내하지 않는다. 인류의 패괴가 일단 이런 정도에까지 이르면 하나님은 더 이상 인내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인내 대신 무엇이 임하겠느냐? 바로 하나님의 노와 징벌이 임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 성품의 일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이 보기에 의인이 있을까? 하나님이 보기에 완전한 자가 있을까? 하나님의 눈에 이 시대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한 시대가 아니냐? 이 시대에 하나님이 온전케 하려는 사람과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인류 이외에 혈육 있는 자는 모두 하나님 인내의 한계에 도전하고 있지 않느냐? 이 세상에서 매일 너희 주변에서 발생하는, 너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직접 경험하는 모든 일들엔 강포가 가득하지 않느냐? 하나님이 보기에 이와 같은 세상과 시대는 끝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지금의 시대적 배경과 노아가 살았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완전히 다르지만, 인류의 패괴를 보는 하나님의 심정이나 분노는 그때와 같다. 하나님이 인내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사역 때문이다. 하지만 각종 상황과 조건을 보면 이 세상은 하나님이 보기에 일찍 멸했어야 했다. 홍수로 세상을 멸했던 그 시대의 상황과 비교하면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 하지만 다른 점은 무엇일까? 이 역시 하나님이 가장 마음 아파하는 부분으로, 너희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홍수로 세상을 멸할 때 하나님은 노아를 불러 방주를 짓게 할 수 있었다. 이로써 홍수로 세상을 멸하기에 앞서 필요한 일을 예비한 것이다. 하나님은 노아라는 사람을 불러 하나님을 위해 일련의 일을 하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는 하나님이 부를 만한 사람이 없다. 왜 그럴까?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해 내가 명확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 말하면 모두들 면목도 없고 괴로울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의인도 아니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완전한 자도 아니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명하신다면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큰 재난이 닥칠 거라고 하셨을 때 우리는 양식과 재난에 필요한 물품을 미리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두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행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역에 아주 잘 협력한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우리가 취한 행동은 노아와 비견할 만하지 않나요? 설마 우리의 이런 행동이 진실한 순종이 아니란 말입니까?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한 게 아니란 말입니까?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말씀대로 행한 것 아닌가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왜 상심하시는 건가요? 왜 부를 만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고 하시는 건가요?” 이런 사람들과 노아의 행위는 차이가 있지 않으냐? 어떤 차이가 있느냐? (오늘날 우리가 재난용 식품을 준비한 건 우리 스스로의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입니다.) (우리가 취하는 모든 행동은 의롭지 않습니다. 하지만 노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인이었습니다.) 정답에 가까운 대답이었다. 노아가 한 일과 지금 사람들이 한 일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노아가 하나님의 명대로 일을 했을 때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몰랐고, 하나님이 무엇을 이루려는지도 몰랐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명하여 그가 해야 할 일을 지시했을 뿐 많은 설명은 하지 않았다. 노아는 명대로 행했지 사사로이 하나님의 뜻을 추측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 대항하지 않았고 두 마음을 품지도 않았다. 그는 순진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그가 일을 하는 데 있어 가졌던 신념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준 사명을 대함에 있어 그토록 명쾌하고 단순했다. 노아의 본질, 즉 그 행위의 본질은 순종이다. 의심하지 않고 대항하지 않으며 개인적 이익이나 이해득실을 고려하지도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한다고 말씀하자 그게 언제냐고 묻지 않았고, 상세한 내용도 묻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왜 세상을 멸하는지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명대로 행했을 뿐이다. 하나님이 무엇으로, 어떻게 지으라고 명한 대로 그는 일일이 행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하나님을 흡족게 해 드려야겠다는 태도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했다. 노아는 자신이 재난을 피하기 위해 그랬던 것이냐? 아니다. 그는 하나님께 얼마 후 세상을 멸할 것인지 물어보았느냐? 그러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이 방주를 짓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소요될지 하나님께 물어보았느냐? 아니면 노아 스스로 알고 있었느냐? 노아도 몰랐다. 그는 단순하게 순종하고 명령대로 행했다. 하지만 지금의 사람들은 다르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약간의 조짐이라도 보이면 불안해하면서 성급한 행동을 취한다. 다른 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모든 대가를 치러 가며 살아남기 위해 먹고 마시고 쓸 것들을 준비한다. 심지어 재난이 닥쳤을 때 자신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로드맵까지도 잘 예비해 둔다. 정말 재미있는 점은 사람의 두뇌는 중요한 시기가 되면 엄청난 ‘효용 가치’를 발휘한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아무런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뒷일을 잘 예비해 놓는다. 그 행동은 ‘완벽’이라는 단어로 묘사될 수 있겠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는 사람도 없고 이해하려는 사람도 없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사람과 노아의 가장 큰 차이점이 아닐까?
노아 이야기의 기록 가운데 너희는 하나님의 일부 성품을 보았겠지? 인류의 패괴와 더러움과 포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에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점에 달하면 그는 더 이상 인내하지 않고 새로운 경영과 계획을 시작하고 자신이 하려는 일을 하여 그의 행사와 다른 측면의 성품을 나타낸다. 그의 ‘행함’은 그의 거스를 수 없음을 나타내기 위함도 아니고, 그에게 권병과 진노가 가득함을 나타내기 위함도 아니며, 그가 인류를 멸할 수 있음을 나타내기 위함도 아니다. 그것은 그의 성품과 그의 거룩한 본질이 더 이상 패괴된 인류가 그의 앞에서 사는 것을, 그의 권세 아래에서 사는 것을 용납하거나 인내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온 인류가 그와 적대적이고 온 땅에 그가 구원할 만한 대상이 하나도 없을 때, 그는 이런 인류를 더 이상 인내하지 않고 주저 없이 멸할 계획을 시행할 것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성품으로 결정된 것이다. 이는 필연적인 결과이자 하나님의 권세하에 살고 있는 모든 피조물이 응당 감내해야 하는 결과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그의 계획을 완성하고, 그가 구원하고자 하는 인류를 구원하려고 하지 않겠느냐?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그를 아예 따르지 않거나 본래 그와 적대적이던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대하고 그에게 대항하는지, 혹은 인류가 어떻게 그를 비방하는지는 안중에도 없다. 그는 오로지 그를 따르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그의 경륜 속에서 그가 구원할 대상이 그에 의해 온전케 되었는지, 그가 흡족해하는 수준에 이르렀는지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런가 하면 그를 따르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가끔 소소한 ‘징계’를 내려 그의 진노를 나타낸다. 예를 들면, 해일, 지진, 화산 폭발 등과 같은 징계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그를 잘 따르고 곧 구원받을 사람을 힘써 보살핀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이다. 한편으로, 하나님은 그가 온전케 하려는 인류에 대해 엄청난 인내와 관용을 베풀고, 최대한도로 기다린다. 또 한편으로, 하나님은 그를 따르지 않고 그와 적대적인 사탄의 부류를 극도로 증오하고 혐오한다. 그는 사탄의 부류가 그를 따르는지, 그를 경배할 수 있는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사탄의 부류에 대해 인내하는 동시에 증오한다. 또한 사탄 부류의 결말을 정하는 동시에 그의 경륜의 시기가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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