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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1/2016

[동방번개]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 3---예수가 오천 명을 배불리 먹임) (하)

예수가 오천 명을 배불리 먹임
(요 6:8~13)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니라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비록 떡과 고기를 먹은 오천 명이 예수를 따를 생각이 없었지만 예수는 이 사람들과 따지지 않았다.
이 사람들이 배불리 먹은 후 예수가 무엇을 하였는지 너희는 알고 있는가? 예수가 그들에게 그 어떤 도를 가르쳤는가? 이 일이 있은 후 예수는 어디로 갔는가? 성경 본문에는 예수가 그들에게 어떤 말씀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 예수는 표적과 기사를 행한 후 조용히 떠났다. 그렇다면 그는 이 사람들에 대해 무슨 요구가 있었는가? 증오가 있었는가? 이런 것이 다 없었다. 그는 단지 전혀 그를 따를 리가 없는 이 사람들을 더 많이 상대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때 그의 마음은 아팠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인류의 타락을 보았고 그에 대한 인류의 저버림도 느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이 사람들을 보거나 이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인류의 우둔함과 무지함이 그의 마음을 아주 괴롭게 하고 또 아주 고통스럽게 했기 때문에 그는 되도록 빨리 이 사람들을 떠나고 싶었을 뿐이다. 비록 주의 마음속에 이 사람들에 대해 그 어떤 요구도 없었고 그가 이 사람들을 상대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더욱이 심혈을 이 사람들 몸에 쏟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그가 그들이 그를 따를 리가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을 대하는 예수의 태도는 그래도 아주 명확했다. 그는 단지 그들을 선대하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려고 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재 아래에 있는 매 하나의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이다. 즉 매 하나의 피조물을 선대하고 매 하나의 피조물에게 공급하고 자양하는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이 말씀으로 된 육신이기 때문에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님 자신의 실질을 유로하였고 그는 이 사람들을 선대하였다. 그는 인자한 마음으로, 넓은 마음으로 이 사람들을 대하였고 이 사람들을 선대하였다. 이 사람들이 예수를 어떻게 대하든지, 어떠한 결과가 있든지 그는 오직 조물주의 신분으로 매 하나의 피조물을 대하였는데, 그의 몸에서 유로된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소시(所有所是)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예수가 조용히 한 가지 일을 한 후 또 조용히 떠났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어떤 방면의 성품인가? 하나님의 자비라고 할 수 있지 않는가? 하나님을 무사(無私)한 분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는가? 하나의 보통 사람으로서 이 점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틀림없이 해낼 수 없다! 실질상에서 말하자면, 예수가 오병이어로 배불리 먹인 이 오천 명은 어떤 사람들인가? 주와 합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가? 모두 하나님과 적대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는가? 확실히 말해서 그들은 절대로 주와 합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그들의 실질은 틀림없이 하나님과 적대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였는가? 그는 한 가지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적대함을 제거하였는데, 이 방식이 바로 ‘선대’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그들을 죄인으로 여겼을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 안중의 피조물이므로 그는 여전히 이 죄인들을 선대하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관용인데, 이 관용은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실질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 어떤 피조된 인류도 해낼 수 없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

   네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과 태도를 참으로 느낄 수 있을 때, 매 하나의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감정’과 염려를 참으로 이해할 수 있을 때 너는 조물주가 그가 만든 매 하나의 피조된 인류의 몸에 기울인 심혈과 쏟은 사랑을 이해할 수 있다. 그때면 너는 하나님의 사랑을 두 단어로 묘사할 수 있다. 어떤 두 단어인가? 어떤 사람은 무사(無私)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박애(博愛)라고 말한다. 이 두 단어 중에서 ‘박애’는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기에 가장 부적합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사람이 한 사람의 넓은 흉금과 심정을 묘사하는 데에 쓰인다. 나는 이 단어를 아주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원칙을 구별하지 않고 대상을 구별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베푼다는 뜻이 있고 우매한 사람, 멍청한 사람의 감정이 흘러넘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단어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한다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뜻이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할 더 적절한 두 단어가 내게 있는데, 어떤 두 단어인가? 첫 번째 단어는 ‘*석대무비(碩大無比)’이다. 이 단어는 예술적인 분위기가 넘치지 않는가? 두 번째 단어는 ‘호한(浩瀚)’이다. 내가 이 두 단어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는 것은 실제적 의의가 그 속에 있다. ‘석대무비’, 이 단어는 글자 표면에서 보면 한 실물의 부피나 용량을 묘사하는 것 같지만 이 실물이 얼마나 크든지 그것은 사람에게 만질 수도 있고 볼 수도 있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며 그것이 사람에게 상대적으로 정확하고 실제적인 개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평면적 각도에서 보든지 아니면 입체적 각도에서 보든지 그것은 모두 그것의 존재를 가상(假想)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석대무비’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면 비록 사람에게 이 단어가 하나님의 사랑을 정량화했다고 느끼게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또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은 정량화하기 어렵다는 것도 느끼게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정량화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 사랑이 공허한 것이 아니고 전설 속에서 생긴 것도 아니라 하나님의 주재 하에서 만물이 함께 누리는 것이고 또한 각 피조물마다 서로 다른 정도로 서로 다른 각도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록 사람에게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게 하지만 오히려 만물로 하여금 자양을 얻게 하고 성장하게 하는데, 만물의 성장이 하나님 사랑의 세부적인 것을 창현하고 있으며 또한 매 시각마다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헤아리고 있고 증거하고 있다. 정량화하기 어렵다고 한 것은 하나님이 만물에게 공급하고 만물을 자양하는 비밀이 인류가 측량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이 만물을 대하고 특히 하나님이 인류를 대하는 마음이 사람이 측량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조물주가 도대체 인류의 몸에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였는지 아무도 알 수 없고, 조물주가 도대체 그가 친히 만든 인류에 대해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이 정이 도대체 얼마나 큰지 누구도 이해할 수 없고 누구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석대무비’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는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 사랑의 드넓음과 실제 존재를 체험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고 또한 사람이 ‘조물주’, 이 몇 글자의 실제 함의를 더 깊이 터득할 수 있고 ‘피조물’, 이 호칭의 진정한 의의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호한’, 이 단어로 보통 무엇을 묘사하는가? 그것은 보통 바다나 우주를 묘사할 때 쓰인다. 예컨대, 호한한 우주, 호한한 바다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우주의 드넓음과 심오하고 고요함은 누구도 닿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그것에 대해 상상과 경앙(敬仰)으로 가득하고 그것의 비밀과 심오함에 대해 바라볼 수는 있으나 닿기는 어렵다. 바다를 생각하면 너는 바다의 드넓음이 떠오를 것이다. 그것은 너에게 그것의 끝을 볼 수 없게 하고 또한 그것의 신비함과 너그러움을 느끼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호한’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는데, 목적은 사람에게 하나님 사랑의 귀중함과 하나님 사랑의 심오함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고 하나님 사랑의 에너지는 무한하고 드넓은 것임을 느끼게 하며 또한 하나님 사랑의 신성함과 하나님의 사랑에서 유로되는 하나님의 존엄과 거스를 수 없음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럼 지금 너희는 내가 ‘호한’, 이 단어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느껴지는가? 하나님의 사랑이 ‘석대무비’와 ‘호한’, 이 두 단어를 능히 감당할 수 있겠는가? 너무나 감당할 수 있다! 인류의 언어 중에서 이 두 단어만이 비교적 적절하고 하나님 사랑에 대한 묘사에 비교적 가깝다. 너희는 적절하다고 느껴지는가? 만약 너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라고 하면 너희는 이 두 단어를 쓸 수 있는가? 틀림없이 너희는 쓸 줄 모를 것이다. 하나님 사랑에 대한 너희의 이해와 체험이 단지 평면적인 범위에만 국한되어 있고 아직 입체 공간의 높이에는 올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너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라고 하면 너희는 말문이 막히고 심지어 할 말이 없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내가 오늘 말한 이 두 단어는 아마 너희가 이해하기 어렵거나 전혀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것은 단지 너희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체험하고 이해한 것이 너무 얕고 범위가 너무 작다는 것을 설명할 뿐이다. 내가 전에 하나님이 무사(無私)한 분이라고 하니, 너희는 무사하다는 것만 기억했구나. 설마 하나님의 사랑을 ‘무사’로밖에 묘사할 수 없단 말인가? 이 범위는 너무 협소한 것이 아닌가? 이 일에서 너희는 많이 상고해야만 어느 정도 수확이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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