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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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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2016

[동방번개](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 3----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

(마 18:21~22)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

   하나님이 도성육신 될 때 그는 따라서 한 단계 사역을 가져오고 그 시대에 발표할 성품과 구체적인 사역 항목을 가져온다.
그 시기에 인자가 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그 시대에서 할 사역 범위를 둘러싸는데, 그는 많이 하지도 않고 적게 하지도 않으며 그가 하는 매 한 마디 말씀과 하는 매 한 가지 사역은 모두 그 시대와 관련된다. 그가 사람의 방식과 사람의 언어로 표현하든지 아니면 신성의 언어로 표현하든지, 어떤 방식과 어떤 각도이든지 그의 목적은 바로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무엇을 하려 하는지, 그의 뜻이 무엇인지, 사람에 대한 그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서로 다른 각도로 사람에게 그의 뜻을 깨닫고 알고 알게 할 것이며 사람을 구원하는 그의 사역을 알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시대에 우리가 보다시피 예수는 많은 경우에 인성의 언어로써 사람에게 그가 설명하려는 문제를 표현했고 동시에 더 많은 경우에 한 평범한 길잡이의 각도에서 사람과 대화하고 사람의 필요를 공급하고 사람의 원하는 바를 도와주었다. 이런 역사 방식은 은혜시대 이전의 율법시대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인데, 그에게 사람과의 친근함이 많아지고 사람에 대한 이해도 많아져 형식과 방식에서 더욱 실제 효과에 도달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는 비유는 이 점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이 비유 중의 숫자가 도달하는 목적은 바로 사람으로 하여금 이 말씀에서 예수가 그때 이 비유를 한 용의를 보게 하는 것이다. 그의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한두 번이 아니고 일곱 번도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남을 용서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여기의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는 하나의 어떤 개념인가? 그것은 바로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을 용서하는 것을 자신의 책임과 자신의 필수과제로 삼고 또한 ‘도’로 삼아 지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록 하나의 비유일 뿐이지만 *화룡점정의 역할을 일으켰다. 그것은 사람에게 예수의 뜻을 깊이 터득하게 하였고 이 말씀 속에서 자신이 실행해야 할 길도 얻게 하였고 실행의 원칙과 표준도 얻게 하였다. 이 비유는 사람으로 하여금 분명히 알게 하였고 사람에게 하나의 정확한 개념도 주었다. 즉 사람으로 하여금 용서를 배워 남을 용서하는 데에 조건도 없고 횟수 제한도 없도록 하며 다른 사람을 양해하고 관용할 수 있는 이런 심리 상태로 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가 이 말씀을 한 동시에 마음속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겠는가? 그가 정말로 생각한 것이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인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용서하는 데에 횟수가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말하는 ‘횟수’에 대해 매우 흥미를 느끼며 이 횟수의 출처와 그것의 함축된 뜻을 알고 싶어 한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예수가 이런 숫자를 말씀했는지를 알고 싶어 하며 이 숫자에 꼭 어떤 더 깊은 함의가 있을 거라고 여긴다. 사실, 이것은 단지 하나님이 인성에서 말씀한 하나의 비유일 뿐이다. 그 어떤 함축된 뜻이나 함의가 있는 말씀이라고 해도 어쨌든 사람에 대한 예수의 요구를 떠날 수 없다. 하나님이 도성육신 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이 한 많은 말씀을 사람은 깨닫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의 말씀은 완전한 신성에서 오고 그가 말씀한 각도와 배경은 사람이 볼 수도 없고 닿을 수도 없는 것이고 사람이 볼 수 없는 영계에서 발표해 낸 것이고 육체 중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꿰뚫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도성육신 된 후 하나님은 인성의 각도에 서서 사람과 대화를 하기에 영계의 범위를 벗어났고 초월했다. 그는 사람의 관념 속에서 상상한 것이나 사람의 생활 속에서 볼 수 있고 접촉할 수 있는 얼마간의 일 또는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과 사람이 터득할 수 있는 언어나 인류가 장악하고 있는 지식으로써 그의 신성에서의 성품과 뜻 그리고 그의 태도를 표현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도달할 수 있는 정도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며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요구 표준을 이해하고 터득하게 하는 데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성에서 역사하는 방식과 원칙이다. 비록 하나님이 육신 중에서 역사하는 방식과 원칙은 더욱 많게는 인성에 의하거나 인성을 통해 도달하지만 오히려 신성이 직접 역사하여 도달할 수 없는 효과를 얻었다. 하나님의 인성에서의 역사 내용은 더욱 구체적이고 더욱 진실하고 더욱 겨냥하는 바가 있으며, 방식상에서도 융통성이 많아졌고 형식상에서도 율법시대를 초월했다.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속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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