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로 말씀이 육신 된 하나님은 결코 말씀이 육신 된 사역을 다 하지 않았고 단지 육신이 해야 할 1단계 사역만 끝냈을 뿐이다. 그러므로 도성육신의 사역을 다 하기 위해 하나님은 두 번째로 육신에 돌아와 육신의 모든 정상과 실제를 다 살아냈다. 즉, 하나님의 도를 가장 정상적이고 평범한 육신에서 나타내어 육신이 다 하지 못한 사역을 완성한 것이다. 두 번째 도성육신은 첫 번째 도성육신의 실질과 같은 면이 있지만 첫 번째 도성육신보다 더 실제적이고 더 정상적이다. 그래서 두 번째 도성육신이 받는 고난은 첫 번째 도성육신이 받은 고난보다 훨씬 크다. 그러나 그런 고난은 육신의 직분으로 인해 있게 된 것이지 결코 패괴(역주: 부패, 타락)된 사람이 받아야 할 고난과는 같지 않다. 그 고난도 역시 육신의 정상과 실제로 인해 있게 된 것이다. 가장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육신에서 직분을 하기 때문에 육신은 분명 많은 고난을 받게 된다. 육신이 정상적이고 실제적일수록 직분을 할 때 받는 고난도 더 크다. 하나님이 극히 평범한 육신에서 사역할 때에는 초자연적인 것이 추호도 없다. 육신이 정상인 데다가 또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을 담당해야 하기 때문에 그가 받는 고난은 초자연적인 육신이 받는 고난보다 훨씬 큰 것이다. 이 고난은 다 육신의 실제와 정상으로 인해 있게 된 것이다. 두 차례 말씀이 육신 되어 직분을 하면서 받은 고난으로부터 도성육신의 실질을 알 수 있다. 정상적인 육신일수록 사역을 담당하면서 받는 고난이 더 크고, 실제적인 육신이 사역을 담당할수록 사람의 관념이 더 깊어지고 감당해야 할 위험도 더 크다. 그러나 실제적인 육신일수록 정상 사람의 완전한 이지가 있고, 정상 사람의 필요가 있는 육신일수록 하나님이 육신에서 하는 사역을 더 잘 담당할 수 있다. 예수는 육신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고 육신으로 속죄제가 되었다. 즉, 정상 인성이 있는 육신으로 사탄을 패배시키고 사람을 십자가에서 완전히 구해냈다. 두 번째의 도성육신은 완전한 육신으로 정복 사역을 하고 완전한 육신으로 사탄을 패배시킨다. 오직 육신이 완전히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육신이라야 비로소 완전한 정복 사역을 할 수 있고 힘 있는 증거를 해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을 정복하는 것은 육신에 있는 하나님의 실제와 정상으로 말미암아 효과에 도달하는 것이지 초자연적인 이적과 계시로 정복하는 것이 아니다. 이번에 말씀이 육신 된 하나님이 하는 직분은 말씀하는 것이다. 말씀으로 사람을 정복하고 사람을 온전케 한다. 즉, 영이 육신에 실제화 된 사역은 바로 말씀하는 것이고 육신의 본직 사역은 말씀하는 것인데, 이것으로 사람을 완전히 정복하고, 드러내고, 온전케 하고, 도태시키는 목적을 이룬다.……』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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