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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6/2016

[동방번개]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욥의 일생 동안의 추구와 수확은 그로 하여금 담담하게 죽음에 직면하게 하였다)

    성경에 욥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었다. (욥 42:17)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말하자면, 욥이 죽을 때 그 어떤 유감도 없었고 그 어떤 고통도 없었으며 자연히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모두가 다 알다시피 욥은 살아있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고 그의 의로운 행위는 하나님께 칭찬받았고 사람들에게도 기념되었다.
그의 일생은 인류 중에서 가장 가치 있고 의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욥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적이 있고 땅에서 하나님께 의인으로 칭함받았으며, 그는 하나님의 시련도 받아들인 적이 있고 사탄에게 시험당하여 하나님을 위해 굳게 증거했기에 하나님 입에서 ‘의인’의 칭호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하나님의 시련을 받아들인 후의 몇십 년 기간에 그는 이전보다 더 가치 있게, 더 의의 있게, 더 착실하게, 더 담담하게 살아갔다. 왜냐하면 그의 의로운 행위가 하나님의 시련을 바꿔왔고 그의 의로운 행위가 그에 대한 하나님의 나타남과 직접적인 말씀을 바꿔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련을 받아들인 후의 몇십 년 기간에 욥은 인생의 가치에 대해 더 실제적으로 느끼고 체득하게 되었으며 조물주의 주재에 대해서도 더 깊은 체득이 있게 되었고 조물주의 축복과 거두어감에 대해 더욱 정확하고 확정된 인식이 있게 되었다. 욥에 관한 성경의 기록 중에 욥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 그에 대한 이전의 축복을 뛰어넘었다고 기록되었는데, 이런 것은 다 욥이 조물주의 주재를 인식함에 있어서의 더욱 유리한 조건이자 역시 욥이 담담하게 죽음에 직면함에 있어서의 더욱 유리한 조건이다. 그러므로 욥을 놓고 말하자면 그가 나이가 차서 곧 죽음에 직면했을 때 그는 절대로 그의 재산에 대해 마음을 놓지 못할 리가 없었고 그 어떤 걱정도 없었으며 그 어떤 유감도 남아있지 않았다. 물론 그는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일생 동안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걷기를 추구했기 때문에 자신의 결말을 염려할 리도 없었다. 욥이 죽음에 직면할 때의 이 일련의 표현은 현재의 사람 중 몇이나 도달할 수 있는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간단한 하나의 겉면의 태도에도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가? 원인은 오직 하나이다. 즉 욥은 하나님의 주재를 믿고 시인하고 순복하는 이런 주관적 추구 하에서 살아간 것이고 또한 하나님의 주재를 믿고 시인하고 순복하는 전제 하에서 그의 인생의 몇 개의 중요한 고비를 겪고 그의 인생 중의 만년을 보내면서 그의 인생 중의 마지막 고비를 맞이한 것이다. 욥이 이 일생 동안 무엇을 경력했든지 간에 그의 추구와 그의 인생 목표는 그에게 있어서 행복한 것이었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의 행복은 결코 조물주의 축복이나 칭찬으로 말미암은 것만이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추구와 그의 인생 목표로 말미암은 것이고 역시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기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조물주의 주재에 대한 그의 점차적인 인식과 진실한 체득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더욱이 그가 조물주의 주재를 경력하는 동시에 직접 체험한 조물주의 기묘한 행사와 이 기간에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지내고 서로 알아가고 서로 이해하면서 마음에 깊이 새긴 매 한차례의 따뜻한 체험과 기억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사람이 조물주의 마음을 깨달아 얻게 된 위로와 즐거움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사람이 조물주의 위대함, 기묘함, 사랑스러움과 신실함을 보고 난 후의 경외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욥이 아무런 고통도 없이 죽음에 직면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의 죽음이 그가 곧 조물주의 곁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고 또한 그의 일생 동안의 추구와 수확이 그로 하여금 담담하게 죽음에 직면하게 할 수 있었고 그로 하여금 담담하게 그의 생명에 대한 조물주의 거두어감에도 직면하게 할 수 있었고 더욱이 그로 하여금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이 성결하게 조물주를 대면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욥이 소유한 행복을 현재의 사람은 얻을 수 있는가? 너희는 소유할 조건이 있는가, 없는가? 조건이 다 구비되었다면 무엇 때문에 현재의 사람은 욥처럼 행복 속에서 살지 못하는가? 무엇 때문에 현재의 사람은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는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어떤 사람은 죽음에 직면할 때 바지에 오줌을 쌀 것이고 어떤 사람은 부들부들 떨 것이며 어떤 사람은 혼절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며 어떤 사람은 심지어 소리내어 통곡할 것인데, 이런 표현은 절대로 죽음이 다가왔을 때에야 사람에게 있게 되는 돌발적인 표현이 아니다. 사람이 죽음에 직면할 때 이런 난감한 표현을 유로(流露)할 수 있는 까닭은 주로 죽음에 대한 사람의 마음 깊은 곳의 두려움 때문이고 사람이 하나님의 주재와 하나님의 안배에 대해 분명한 인식과 체득이 없고 더욱이 진실한 순복도 없기 때문이며 사람이 스스로 모든 것을 안배하고 장악하려고만 하고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장악하고 자신의 생사를 장악하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사람이 늘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것 없다.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속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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