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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2016

[동방번개]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 3---예수가 오천 명을 배불리 먹임) (상)

 예수가 오천 명을 배불리 먹임
(요 6:8~13)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니라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오병이어’, 이것은 어떤 개념인가? 보통 오병이어이면 몇 사람이 먹을 수 있는가?
만일 보통 사람의 식사량으로 가늠한다면 겨우 2 명만 먹을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오병이어가 사람에게 주는 최소한의 개념이다. 하지만 이 단락의 성경 본문에 기술된 오병이어는 몇 명에게 나누어 주었는가? 성경 본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오병이어에 비하면 오천 명이란 이 수가 많지 않은가? 이 수가 많다는 것은 무엇을 설명하는가? 사람이 보기에 오병이어를 오천 명이 먹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 양자 간에 차이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한입씩 조금만 먹는다 해도 이 오병이어는 오천 명이 먹기에 부족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예수가 한 가지 표적과 기사를 행하였는데, 그는 오천 명을 모두 배불리 먹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머지도 있었다. 성경에서 말한 바와 같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이 표적은 사람에게 예수의 신분과 지위를 보게 했고 또한 하나님께는 이루지 못할 일이 없고 하나님이 전능하다는 이 사실도 보게 했다. 여기에서는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일 수 있었는데, 만약 음식물이 없었다면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일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 당연히 먹일 수 있다!
이것은 표적과 기사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사람이 불가사의하다고 여기고 기묘하여 헤아릴 수 없다고 여기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 있어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보통 일이라면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 해석하려고 하겠는가? 왜냐하면 이 표적의 뒤에는 여태껏 인류가 발견하지 못한 예수의 뜻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 먼저 이 오천 명이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를 알아보도록 하자. 이 오천 명이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인가? 성경 본문에서 알다시피 그들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는가? 결코 몰랐다! 최소한 그들은 눈앞에 서있는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지 몰랐다. 아마 일부분 사람들은 그의 이름만 알고 그가 어떤 일을 하였는지에 대해 알거나 들었을 것이다. 전설 속의 예수에 대해서는 그들이 호기심만 갖고 있었을 뿐이지 따른다고는 전혀 말할 나위도 없고 예수 본인에 대해 알고 있다고는 더욱 말할 나위도 없다. 예수가 이 오천 명의 사람들을 보았을 때 그들은 배가 고파서 그저 배불리 먹을 생각뿐이었는데, 이런 배경에서 예수가 그들의 소원을 만족시켜 주었던 것이다. 예수가 그들의 소원을 만족시켜 준 동시에 그의 마음속에서는 어떻게 생각했겠는가? 그냥 배불리 먹으려고만 하는 그 사람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무엇이었겠는가? 여기에서 예수의 생각과 태도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실질에 관련된다. 배가 고파서 그저 한 끼를 배불리 먹으려고만 하는 이 오천 명을 마주하여, 예수에 대해 호기심으로 가득차고 또 기대로 가득찬 이 오천 명을 마주하여 예수는 단지 그 표적과 기사를 빌어 이 오천 명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려 하였을 뿐이지 그는 결코 이 오천 명이 그를 따를 수 있기를 지나치게 바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이 사람들이 그저 구경거리에 끼어들기 위해서이고 그저 떡으로 배불리 먹기 위한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자리에서 오병이어로 이 오천 명을 배불리 먹임으로써 구경하기 좋아하고 표적 보기 좋아하는 이 오천 명에게 시야를 넓혀 주고 도성육신 하나님이 이룰 수 있는 일을 직접 보게 해 준 것이다. 비록 예수가 사실로써 그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었지만 그는 마음속으로 이미 이 오천 명은 단지 떡으로 배불리려고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설교도 하지 않고 단지 그들로 하여금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는 것만 보게 하였다. 그는 이 사람들에 대해 진정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대하는 것처럼 대할 리가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무릇 피조물이라면 다 그의 주재 아래에 있고, 무릇 그의 안중에 있는 피조물이라면 만약 필요하다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에게서 오는 은혜를 누리게 할 것이다. 설령 이 사람들이 그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그를 알아가지도 않고 심지어 떡을 먹고 물고기를 먹은 후에도 그에 대해 아무런 인상도 없거나 아무런 감사도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이런 일을 따지지 않고 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를 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 데는 원칙이 있으니 불신자에 대해 하나님께서 보살펴 주시지도 않고 보호해 주시지도 않으며 더욱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도 못하게 하실 겁니다.”라고 말한다. 사실상 그러한가? 하나님의 안중에 무릇 살아 있는 것이라면, 무릇 그가 만든 피조물이라면 그는 다 관리하고 보살펴 줄 것이며 서로 다른 방식으로 대하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안배하고 주재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만물을 대하는 하나님의 마음과 태도이다.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속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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