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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9/2016

[동방번개]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 3)

   육신에서 살고 있는 도성육신 하나님으로서, 그에게 정상적 인성이 있었고 그는 정상적인 사람이 구비한 감정과 이성(理性)을 구비하였으며 그는 무엇이 기쁨이고 무엇이 고통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가 인류의 이런 생활을 보았을 때 그는 단지 사람에게 얼마간의 교훈만 하고 사람에게 얼마간의 공급이나 가르침만 주면 사람을 죄 속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계명만 지키게 하면 사람을 죄 속에서 구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오직 그 자신이 인류의 죄를 담당하고 죄 있는 육신의 형상이 되어야만 사람의 자유를 바꿔 오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함을 바꿔 올 수 있다고 깊이 느꼈다. 그러므로 예수가 인류의 죄 속에서의 생활을 체험하고 목도한 후 그의 마음속에 강렬한 한 가지 소망━인류를 죄 속에서 모색하는 생활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소망이 생겼다. 이 소망은 그에게 더욱더 자신이 되도록 일찍, 되도록 빨리 십자가에 올라 인류의 죄를 담당해야 한다고 느끼게 했다. 이것이 바로 그 당시 예수가 인류와 함께 생활하면서 죄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인류의 참상을 보고 듣고 느낀 후의 그의 마음과 생각이었다. 하나님이 도성육신 되어 인류에 대해 이런 뜻이 있을 수 있고 이런 성품을 발표하고 유로할 수 있는데, 이것은 보통 사람이 구비할 수 있는 것인가? 보통 사람이 이런 환경에서 살면서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만일 하나의 보통 사람이 이 모든 것에 직면한다면 그가 높은 각도에 서서 문제를 볼 수 있겠는가? 틀림없이 그럴 수 없다!
설령 하나님 도성육신의 겉모습이 사람과 똑같고 사람의 지식도 배우고 사람의 언어로 말하며 심지어 어떤 때에 사람의 방식을 쓰거나 사람의 논법을 인용하여 그의 뜻을 표현할지라도 인류를 대하고 일을 대하는 그의 실질은 패괴된 인류와 절대로 같지 않은 것이고 또한 그가 선 각도와 높이는 그 어떤 패괴된 인류도 닿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리이기 때문에 그가 입은 육신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자신의 실질을 구비하고 있으며 그의 마음과 그의 인성이 발표해 낸 것도 마찬가지로 모두 진리이다. 패괴된 인류에게 있어서 육신이 발표한 것은 모두 진리의 공급이자 역시 생명의 공급인데, 이런 공급은 단지 어느 한 사람만 겨냥한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겨냥한 것이다. 패괴된 사람에게 있어서 누구든지 그의 마음속에 용납할 수 있는 사람은 다만 자신과 상관있는 그 몇 사람뿐이고, 그가 관심을 갖는, 걱정하는 사람도 단지 그 몇 사람뿐이다. 재난이 닥치면 그가 먼저 생각하는 것은 자기 집의 아이, 자기의 남편이나 아내 혹은 자기의 부모이다. 비교적 ‘박애(博愛)’하는 사람은 기껏해야 어떤 친척이나 괜찮은 친구만 생각할 것이다. 그가 더 많이 생각할 수 있는가? 영원히 그럴 수 없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사람이기에 사람은 단지 사람의 각도와 사람의 높이에 서서 모든 것을 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이 말씀으로 된 육신은 패괴된 인류와 완전히 다르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된 이 육신이 얼마나 보통이든지, 얼마나 정상적이든지, 얼마나 낮든지, 심지어 사람들이 얼마나 깔보든지 그의 생각과 인류에 대한 그의 태도는 그 어떤 사람도 구비할 수 없고 모방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는 영원히 신성의 각도에 서서, 조물주의 높이에 서서 인류를 관찰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실질로, 하나님의 마음 상태로 인류를 대한다. 그는 절대로 보통 사람의 높이에서, 패괴된 사람의 각도에서 인류를 대할 리가 없다.
사람이 인류를 보는 것은 사람의 안목으로 보고 사람의 지식, 사람의 규례, 사람의 학설 등등을 가늠 표준으로 하는데, 이 범위는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범위이고 패괴된 인류가 닿을 수 있는 범위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보는 것은 하나님의 안목, 하나님의 실질, 하나님의 소유소시(所有所是)를 가늠 표준으로 하는데, 이 범위는 사람이 볼 수 없는 범위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말씀으로 된 육신과 패괴된 인류와의 확연히 다른 부분이다. 이 다름은 각자의 실질로 인해 결정된 것이며, 바로 실질의 다름이 각자의 신분과 지위를 결정하였고 사물을 대하는 각자의 각도와 높이도 결정하였다. 예수의 몸에서 너희는 하나님 자신의 발표와 유로를 보았는가? 다시 말해서, 예수가 한 것과 말한 것은 모두 그의 직분과 관계되고 하나님 자신의 경영 사역과 관계되며 모두 하나님 실질의 발표와 유로이다. 설령 그에게 인성의 표현이 얼마간 있을지라도 그의 신성의 실질과 유로를 부인하지 못한다. 이런 인성의 표현은 참으로 인성의 표현인가? 그와 패괴된 인류의 인성 표현은 실질상에서 완전히 다르다. 예수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된 육신이다. 그가 만일 정말로 패괴된 인류 중의 한 평범한 일원이라면 그가 신성의 각도로 인류의 죄악된 생활을 대할 수 있겠는가?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인자와 보통 사람과의 차이이다. 패괴된 사람은 모두 죄 속에서 살고 있기에 그 누구든 죄를 봐도 아무런 느낌이 없고 다 같은 것이다. 마치 돼지가 진창에서 살면서 그 어떤 불편한 느낌도 없고 더러운 줄도 모르고 맛나게 먹고 달게 자는 것과 같다. 사람이 만약 돼지우리를 깨끗하게 청소하면 돼지는 오히려 불편함을 느끼고 깨끗함을 유지할 수도 없다. 얼마 가지 못하고 돼지는 또 진창에서 이리저리 뒹구는데 매우 자유롭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더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보기에 돼지는 정말 더럽다. 네가 그것에게 깨끗이 청소해 줘도 그것이 좋은 줄을 모른다. 그래서 돼지를 집 안에서 키우는 사람이 없다. 사람이 돼지를 대하는 것이 영원히 돼지 자체의 느낌과 다른 것은 바로 사람과 돼지가 같은 부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말씀이 육신 된 인자가 패괴된 사람과 같은 부류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된 육신만이 하나님의 각도에 서서, 하나님의 높이에 서서 인류를 대하고 모든 것을 대할 수 있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속편)≫에서 발췌 ≫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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