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를 방금 너희는 다 들었겠지! 그는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한 후 선정한 인물인데, 그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그가 100세, 그의 아내 사라가 90세일 때 하나님의 약속이 그에게 임했다.
하나님이 그에게 어떤 약속을 주려 하였는가? 그것은 바로 성경 본문에 언급된“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했을 때 그의 당시의 배경이 어떠했는가? 성경 본문에 이렇게 기록되었다.“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즉 이 노부부는 그 나이에 자녀를 출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아브라함은 무엇을 했는가? 그는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라고 말했다. 아브라함은 이것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그 뜻은 그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그저 우스개에 불과하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사람이 보기에 이것은 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일이고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도달할 수 없고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아주 우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도 사람이 이렇게 나이 들어 아이를 낳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하나님이 놀랍게도 모르시다니. 또 나보고 낳아 키우라고 아들을 하나 주겠다고 하시는데 이건 불가능한 일이야!’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땅에 엎드린 동시에 웃으면서 마음속으로 ‘불가능해,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건 사람과 농담하시는 거야, 이건 진짜일 수 없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담으로 여기지 않았다.그럼 아브라함은 하나님 안중에 어떤 사람인가? (의인입니다.) 어디에서 그를 의인이라고 했는가? 너희는 무릇 하나님이 부른 사람이라면 다 의인이고 다 온전한 사람이고 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규례만 지킨다! 이 일을 너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아무렇게나 한 사람에게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인이라고 말씀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각 사람에 대해 모두 하나의 가늠 표준이 있다. 비록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지만 이 일에서의 아브라함의 표현을 놓고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인가? 막연한 것이 좀 있는가, 없는가? 그의 믿음이 큰가? 크지 않다! 그의 웃음과 그가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은 이미 그 사람을 대표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를 의인으로 여기는 것은 순전히 상상이고 함부로 규례에 맞추는 것이며 무책임한 평가이다. 아브라함의 웃음과 그의 작은 행동을 하나님이 보지 못했겠는가, 알지 못했겠는가?하나님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작정한 일을 하나님이 바꿀 리가 있겠는가? 없다! 하나님이 이미 다 계획해 놓고 이 사람을 택하려고 뜻을 정했을 때 그 일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사람에게 어떤 표현이 있든지 하나님께 있어서는 조금도 영향과 방해를 받지 않는다. 하나님은 아무렇게나 그의 계획을 바꿀 리가 없고 사람의 표현 더구나 무지한 표현 때문에 아무렇게나 그의 계획을 바꿀 리도 없고 그의 계획을 파괴할 리도 없다. 그러므로 ≪창세기≫ 17장 21~22절에 뭐라고 말씀했는가?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아브라함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하는지에 대해 하나님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아랑곳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때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고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높은 인식이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더욱이 사람에게 하나님이 한 일과 한 말씀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려고 뜻을 정했는지, 어떤 사람을 택하려고 뜻을 정했는지, 그가 일을 함에 어떤 원칙이 있는지, 그는 사람에게 완전히 터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람의 분량이 전혀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때 아브라함이 무엇을 하든지, 어떻게 표현하든지 하나님이 보기에 다 아주 정상이었다. 하나님은 결코 정죄하지 않고 질책하지도 않고 단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이삭을 낳을 것이니라”고 말씀했을 뿐이다. 하나님께 있어서 이 일은 하나님 말씀의 발함에 따라 점차적으로 응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안중에 그가 이루려고 계획한 일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이 일을 안배한 후 떠났다. 사람이 어떻게 하든지, 어떻게 생각하든지, 사람이 어떻게 이해하든지, 사람이 어떻게 계획하든지 하나님과는 상관없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시간과 절차에 따라,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계속 앞으로 발전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 원칙이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어떻게 인식하든지 하나님은 간섭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사람이 믿지 않고 이해하지 못한다 하여 그의 계획을 포기할 리가 없고 그의 역사를 포기할 리도 없다. 사실은 이렇게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경에서 본, 하나님이 그가 정한 시간에 이삭을 태어나게 한 것이다. 사실이 증명하다시피, 사람의 행위와 표현이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았는가? 가로막지 못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작은 믿음,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 하나님의 역사에 영향을 주었는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조금도 영향을 주지 못했다! 하나님의 경영 계획은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일도, 그 어떤 환경도 영향을 주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 그가 하려고 작정한 모든 일은 다 그의 계획에 따라 제때에 완성되고 이루어지며, 그의 사역은 아무도 가로막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의 일부 우매와 무지에 대해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일부 저촉과 관념에 대해 하나님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우려할 것 없이 그가 하려는 사역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이자 그의 무소불능(無所不能)의 표현이다.』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속편)≫에서
댓글 없음:
댓글 쓰기